From you have I been absent in the 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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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대학살 2

일종의 에필로그-연구교수님과의 논의, 4.3,5.18,난징

내 언젠가 이걸 가지고 글 쓸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리도 빨리 올지 몰랐다. 자... 썰을 풀어보자면.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논문을 퍼블리쉬 하면서 같이 co-working한 연구교수님이 제주도 출신이었다. 논문이 마무리 되어가는 과정에서 교수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할 수있었다. 논문은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과연 있을까?) 난징대학살과 난징대학살의 해석과 기억에 대하여 중일간의 국제정치적 충돌을 다룬 논문이었다. 연구교수님의 전공은 본래 일본정치사상(오규소라이부터 후쿠자와 유키치, 마루야마 마사오까지)이었던 관계로 팩트 같은 것들은 내가 본래 자신이 있었고 교수님은 논문 방향이나 함의에 대해 조언을 많이 주셨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학계에서 일본정치 연구하시는 분들은 난징대학살에 대해 중국이..

난징대학살과 기억의 정치의 중일관계의 연관성-텀페이퍼 내부에서 인용-

냉전이 점점 와해되어가면서 일본의 다나카 정부는 중일관계 개선에 역점을 두었다. 1972년 중일 수교이후 중국정부는 기본적으로 일본과 우호적인 유지하려 하였다. 중일관계가 양 국의 지도부의 왕래로 개선되고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양 국은 서로의 접촉점이 증대되면서 점차 서로의 교류가 증대되었다. 이렇게 교류가 증대되면서 서로의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상호간의 교류도 증가하였다. 여기에서 서로의 기억의 정치가 충돌이 발생하였다. 과거사에 대한 서로의 해석과 인식이 달랐기 때문에 결국 서로의 기억의 교류는 불일치를 가져왔다. 교과서 문제와 망언의 문제가 본격화 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냉전 시기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충돌의 여지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중일관계가 개선되면서 이런 문제는 양국관계에 있어 방해요소로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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