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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언젠가 이걸 가지고 글 쓸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리도 빨리 올지 몰랐다.
자... 썰을 풀어보자면.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논문을 퍼블리쉬 하면서 같이 co-working한 연구교수님이 제주도 출신이었다. 논문이 마무리 되어가는 과정에서 교수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할 수있었다. 논문은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과연 있을까?) 난징대학살과 난징대학살의 해석과 기억에 대하여 중일간의 국제정치적 충돌을 다룬 논문이었다. 연구교수님의 전공은 본래 일본정치사상(오규소라이부터 후쿠자와 유키치, 마루야마 마사오까지)이었던 관계로 팩트 같은 것들은 내가 본래 자신이 있었고 교수님은 논문 방향이나 함의에 대해 조언을 많이 주셨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학계에서 일본정치 연구하시는 분들은 난징대학살에 대해 중국이 공인하는 피해(라고 쓰고 참상이라고 읽는다.)에 대해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5만 살상 드립치는 하타 이쿠히코에 저술에 대해 더 신용할 정도이다. 난징까지 가서 나름 그 참상의 잔해를 보았던 나로서는 그렇게 쉽게 하타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이었기 때문에 연구교수님과 계속 논의를 이어나갔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사실 본질적으로 논문과는 큰 상관관계가 없었다.
첫째 논의는 이 난징대학살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 우린 알지도 못하고 그러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 및 정말 몰랐을까 여부였다. 이건 연구교수님이 나에게 사실 자신은 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궁금하다며 나한테 물어봤고 난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한스 프랑크 같이 모든 죄를 인정했고 '나한테 책임이 있다 하지만 너희들은 책임이 없느냐.'라고 일갈한 사람도 있지만 괴링과 같이 '난 모른다, 난 사인한 적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인정한 사람은 프랑크같은 사람이고 인정하지 못하고 끝까지 뻣대는건 괴링같은 경우가 아니겠냐고 했다. 일종의 인지부조화라고 난 말했다. 연구교수님은 그 설명에 깨끗이 수긍하였다.
둘째 논의는 학살의 잔학성이었다. 난 난징대학살의 잔학성에 대해서도 그 정도가 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인 동시에 중국이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언술에도 동의하는 바였다. 난 잔학성에 하지만 무게를 두는 바였지만 연구교수님은 조금 다를 수 있다며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나에게 4.3과 5.18얘기를 해주었다.
연구교수님은 본래 제주도 '산'출신이었다. 물론 '산' 부락 출신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말이 가지는 상징성에 대해서는 4.3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슨 얘기인지 확 다가 올 것이다. 연구교수님은 이런 얘기를 했다. 마을이 없어진 경우는 많지만 마을 사람을 모두 몰살한 경우는 없다. 가족 전체를 참살한 경우도 많았지만 집안 전체를 몰살한 경우는 사실 없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가해자 입장에서도 결국 자신이 살기 위해 알려진 것 처럼 그리 잔인하지만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5.18의 얘기도 계속 이어졌다. 사실 본인도 광주출신이기 때문에 이 얘기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잔인했다는 5.18진압도 사망자가 500명이 안된다는 것에는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500명밖에 안된다고 일종의 가해자의 범죄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죄가 있다고 단죄를 하는 것과 그 죄의 잔학성이 심각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서는 내가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난 일본과 중국은 완전한 타자다. 4.3과 5.18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 아니냐 라는 반론을 제기했지만 잔학성에 대한 정치적 과장이 개입했고 그것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에는 부정할 수 없았다. 사실 극동군사재판 당시 중국은 처음에 사망 50만을 얘기했지만 연합국 군사법정은 30만을 공식 수치로 채택했고 이후 중국은 간간히 50~60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도 중국 공식적인 수치로 30만을 유지하고 있다. 50만에서 20만이 줄어드는 것은 그리 간단한 수치가 아님에도 정치적으로 20만을 줄인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대량학살이나 비인간적인 집단 범죄를 볼 때 그 잔학성을 먼저 보지 정치성을 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이유에서 잔학성의 재생산이나 증폭이 이뤄지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전에 있어 정치적 함의를 먼저 본다면 보다 그 사건에 대한 본질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대량학살을 비롯한 비인도적 집단 범죄와 그것에 관련한 해석과 기억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현재에 있어 어떠한 사건을 보는 데 있어 중요한건 팩트나 잔학성도 사실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왜 그렇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그 사건을 중심으로 어떠한 사건이 꼬리를 무는지가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
자... 썰을 풀어보자면.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논문을 퍼블리쉬 하면서 같이 co-working한 연구교수님이 제주도 출신이었다. 논문이 마무리 되어가는 과정에서 교수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할 수있었다. 논문은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과연 있을까?) 난징대학살과 난징대학살의 해석과 기억에 대하여 중일간의 국제정치적 충돌을 다룬 논문이었다. 연구교수님의 전공은 본래 일본정치사상(오규소라이부터 후쿠자와 유키치, 마루야마 마사오까지)이었던 관계로 팩트 같은 것들은 내가 본래 자신이 있었고 교수님은 논문 방향이나 함의에 대해 조언을 많이 주셨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학계에서 일본정치 연구하시는 분들은 난징대학살에 대해 중국이 공인하는 피해(라고 쓰고 참상이라고 읽는다.)에 대해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오히려 5만 살상 드립치는 하타 이쿠히코에 저술에 대해 더 신용할 정도이다. 난징까지 가서 나름 그 참상의 잔해를 보았던 나로서는 그렇게 쉽게 하타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이었기 때문에 연구교수님과 계속 논의를 이어나갔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사실 본질적으로 논문과는 큰 상관관계가 없었다.
첫째 논의는 이 난징대학살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 우린 알지도 못하고 그러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 및 정말 몰랐을까 여부였다. 이건 연구교수님이 나에게 사실 자신은 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궁금하다며 나한테 물어봤고 난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한스 프랑크 같이 모든 죄를 인정했고 '나한테 책임이 있다 하지만 너희들은 책임이 없느냐.'라고 일갈한 사람도 있지만 괴링과 같이 '난 모른다, 난 사인한 적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인정한 사람은 프랑크같은 사람이고 인정하지 못하고 끝까지 뻣대는건 괴링같은 경우가 아니겠냐고 했다. 일종의 인지부조화라고 난 말했다. 연구교수님은 그 설명에 깨끗이 수긍하였다.
둘째 논의는 학살의 잔학성이었다. 난 난징대학살의 잔학성에 대해서도 그 정도가 상당하다고 생각하는 바인 동시에 중국이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언술에도 동의하는 바였다. 난 잔학성에 하지만 무게를 두는 바였지만 연구교수님은 조금 다를 수 있다며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나에게 4.3과 5.18얘기를 해주었다.
연구교수님은 본래 제주도 '산'출신이었다. 물론 '산' 부락 출신의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 말이 가지는 상징성에 대해서는 4.3을 아는 사람이라면 무슨 얘기인지 확 다가 올 것이다. 연구교수님은 이런 얘기를 했다. 마을이 없어진 경우는 많지만 마을 사람을 모두 몰살한 경우는 없다. 가족 전체를 참살한 경우도 많았지만 집안 전체를 몰살한 경우는 사실 없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가해자 입장에서도 결국 자신이 살기 위해 알려진 것 처럼 그리 잔인하지만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5.18의 얘기도 계속 이어졌다. 사실 본인도 광주출신이기 때문에 이 얘기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잔인했다는 5.18진압도 사망자가 500명이 안된다는 것에는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500명밖에 안된다고 일종의 가해자의 범죄가 가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죄가 있다고 단죄를 하는 것과 그 죄의 잔학성이 심각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서는 내가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난 일본과 중국은 완전한 타자다. 4.3과 5.18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 아니냐 라는 반론을 제기했지만 잔학성에 대한 정치적 과장이 개입했고 그것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에는 부정할 수 없았다. 사실 극동군사재판 당시 중국은 처음에 사망 50만을 얘기했지만 연합국 군사법정은 30만을 공식 수치로 채택했고 이후 중국은 간간히 50~60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도 중국 공식적인 수치로 30만을 유지하고 있다. 50만에서 20만이 줄어드는 것은 그리 간단한 수치가 아님에도 정치적으로 20만을 줄인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대량학살이나 비인간적인 집단 범죄를 볼 때 그 잔학성을 먼저 보지 정치성을 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 이유에서 잔학성의 재생산이나 증폭이 이뤄지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그전에 있어 정치적 함의를 먼저 본다면 보다 그 사건에 대한 본질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대량학살을 비롯한 비인도적 집단 범죄와 그것에 관련한 해석과 기억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현재에 있어 어떠한 사건을 보는 데 있어 중요한건 팩트나 잔학성도 사실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왜 그렇게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그 사건을 중심으로 어떠한 사건이 꼬리를 무는지가 더 중요하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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