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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Politics of Identitiy

한 인용구를 보고.. 르낭과 보드리야르

Fulton 2011. 6. 10.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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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망각도 학살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학살의 망각은 또한 기억의 학살이며, 역사의 학살이고, 사회적인 것 등의 학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망각은 또한 사건만큼이나 본질적인 것이다.-장 보드리야르,『시뮬라시옹』



이 글은 분명 에르네스트 르낭의 망각도 기억으로서 Nation이 만들어지는 데 기여한다는 문장에 대한 보드리야르식 재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보드리야르는 여기서 르낭보다 조금 더 급진적으로 나아갔는데 그것은 학살의 망각을, 역사의 학살과 사회적 관념의 학살로 동치시켰다는 것이다. 르낭은 망각에 대해서 집단 망각과 집단 기억의 매커니즘은 결국 같으며 이는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 보드리야르는 망각에 대해서 르낭과 달리 '타자에 대한 폭력'을 지적했다. 하지만 르낭은 망각과 기억 양자의 폭력성 모두 지적하며, 동시에 '자신에 대한 폭력'에 지적을 한다.

보드리야르의 지적은 분명 홀로코스트를 지적하는 것이고, 르낭의 언술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발생한 자코뱅파의 학살에 대해서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앞의 시뮬라시옹의 구절을 인용한 트윗은 여러 의미로서 사용되었겠지만 동시에 일본에 대한 방향성을 부인하기는 조금 어려울 것이다.

망각과 기억을 통한 국민국가가 형성된다면, 그 국민국가 형성 이후의 국제관계가 파생되면서 망각과 기억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망각과 기억은 어떻게 수정되고, 어떻게 포용되어야 하는가? 이것은 한번 즈음 고민해볼만한 주제이다. 단순히 우리의 기억 역시 망각을 동반하는 것이라 필자는 생각하며, 저쪽의 망각 역시 저쪽의 국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동반하는 기억인 것이다. 우리의 기억 역시 완벽할 수 없고, 저쪽의 망각 역시 옳은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검토일 수도 있다. 그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저쪽이 옳지 않다하더라도 우리가 모두 옳다라는 명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기억과 망각에 관련한 일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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