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형의 말을 보고 그 동안 생각 하던 무언가를 써보려 한다. 필자 역시 ‘냉혹한 혹은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국제정치에서의 현실주의적 시각에 불신을 가지고 있거나 도덕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주의 이론이 가지는 매력을 필자 역시 좋아하며, 이론적인 틀 안에서 현실주의 이론들이 가지는 완결성을 개인적으로는 참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이 ‘국제정치는 냉엄하다.’ 혹은 ‘국제정치는 원래 냉혹하다.’라는 말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국제정치는 다양한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국제정치가 인간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국제정치와 인간 자체를 분리할 수 없고, 헤들리 불(Hedley Bull)의 견해처럼 국제정치에서의 인간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결국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이러한 사회가 연결되어 국제정치를 발생하듯이 오로지 국제정치가 냉엄하다라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즉 국제정치의 냉혹함도 결국 국제정치가 가지는 하나의 속성이지 ‘국제정치는 냉엄하다.’라는 정리로 나타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윤리적 측면을 생각해 봐야 한다. 카틴 숲과 난징대학살의 유해 발굴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 제암리 학살 현장을 보며 국제정치는 냉혹하다라는 말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이 그들의 죽음에 설명이 될 수 있는가? 차라리 ‘인간은 본래 잔인하며 악하다.’라는 말이 더 본질적인 설명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국제정치의 냉혹함에 희생된 사람들이 아닌 인간의 자기파괴적인 행위에 희생된 것이지, 국제정치의 어떠한 본질에 의해 그런 비참함을 겪었던 것이 아니다.
무심코 너무도 쉽게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얘기하지만 그것이 과연 국제정치가 냉혹한 적자생존과 힘의 논리에 의해 전개 되서인지 아니면 그러한 힘의 논리와 적자생존만이 국제정치의 본질이다라고 생각해서 인지에 대해서는 분명 성찰이 필요하다. EH 카도 우드로 윌슨도 심지어 임마누엘 칸트가 지적한 측면도 바로 이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국제정치가 냉혹한 성격을 가진다.’는 어떤 하나의 분석과 발견의 결과를 본질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논리적 비약이다. 국제정치가 속성적으로 냉혹하며 잔인하다고 말하는 것은 케네스 왈츠(Kenneth Waltz)가 이전의 국제정치를 비판하는 언사 중 하나인 국제정치를 지나치게 인간 속성의 층위에서만 바라보는 오류일지도 모른다.
국제정치가 냉혹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결과를 모두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꼰대질이기 이전에 수많은 논리적 비약과 오류를 통해야만이 가능한 결론이다. 과연 그 말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위안부 기념비 앞에서도 말할 수 있는 ‘국제정치의 속성’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필자는 국제정치이론을 처음 배울 때는 죄다 자유주의자들 틈에서 배웠고 지금은 현실주의자들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조금은 많은 전제를 필요로 하는 자유주의적인 패러다임보다는 간명한 현실주의 패러다임을 보다 설명하는 틀로서 선호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것을 선호하는 것은 현실주의 이론이 가지는 논리적 간결성과 설명력 때문이지 현실주의가 발견한 ‘국제정치의 성격 중 하나’가 ‘국제정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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