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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Korean Politics

미학 우선의 정치 비판: 두 유형에 관한 고찰

by Hwajun Lee 2025. 12. 21.

정치적 판단의 숨겨진 기준

정치적 입장을 선택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통상적인 대답은 정책의 정당성, 효과, 혹은 가치와의 합치 여부일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다른 가능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즉, 정치적 선택이 실제로는 정책의 내용보다 그 입장을 취한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에 의해 상당 부분 추동되는 현상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본고에서는 “정치의 미학화”라 부르고자 한다. 여기서 미학화란 정치적 판단의 기준이 윤리적·실용적 고려에서 심미적 고려로 이동하는 사태를 가리킨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정책이 옳은가” 혹은 “이 정책이 효과적인가”라는 질문이 “이 정책을 지지하는 내가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되는 현상이다.


이 문제의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발터 벤야민은 1930년대에 이미 “정치의 미학화”를 파시즘의 핵심 특성으로 지목한 바 있다. 그러나 본고는 벤야민의 경고가 파시즘이라는 역사적 특수성을 넘어 보다 광범위한 적용 가능성을 지닌다고 본다. 오늘날 정치의 미학화는 특정 이념적 진영에 국한되지 않으며, 오히려 상이한 형태로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본고는 정치의 미학화가 취하는 두 가지 주요 양태를 분석하고자 한다. 하나는 급진성과 저항의 낭만을 추구하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성과 냉철함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형태이다. 편의상 전자를 “뜨거운 미학”, 후자를 “차가운 미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유형은 표면적으로 대립하며 서로를 경멸하지만, 심층적으로는 동일한 구조적 오류를 공유한다는 것이 본고의 핵심 논지이다. 나아가 본고는 이러한 미학화가 정치의 본래적 성격, 즉 지난하고 불완전한 갈등 조정의 과정이라는 본성을 은폐하거나 왜곡한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정치의 미학화에 관한 이론적 배경

발터 벤야민은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파시즘을 “정치의 미학화”로 규정했다. 벤야민이 주목한 것은 파시즘이 대중에게 호소하는 방식이었다.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의 장대한 연출, 레니 리펜슈탈의 영상미학, 통일된 군중의 행진 등은 정치를 일종의 총체예술(Gesamtkunstwerk)로 전환시켰다. 이 구조에서 중요한 것은 정책의 내용이나 정당성이 아니라 형식의 장엄함, 즉 심미적 경험 그 자체였다.


벤야민의 분석에서 핵심적인 통찰은 미학화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 자체를 대체한다는 점이다. 대중은 정책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스펙터클을 감상한다. 정치 참여는 비판적 숙고가 아니라 미적 몰입이 된다. 이로써 정치적 책임의 물음은 증발하고, 대신 형식에 대한 황홀경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벤야민의 분석을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적 미학화는 파시즘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벤야민이 포착한 구조, 즉 심미적 판단이 정치적 판단을 대체하는 메커니즘은 여전히 유효한 분석틀을 제공한다. 다만 현대적 맥락에서 이 구조는 보다 개인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전체주의적 스펙터클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 구성과 자기 이미지 관리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별짓기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취향은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사회적 위치를 표시하고 구별을 생산하는 기제다. 정치적 입장 역시 이러한 구별 짓기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요컨대, 현대의 정치적 미학화란 특정 정치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자기 이미지를 구성하고 유지하려는 경향을 가리킨다. 정책의 효과나 정당성보다 그 입장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정체성이 우선시되는 현상이다.

정치의 본래적 성격 — 지루함과 불완전성의 영역

정치의 미학화가 왜 문제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을 은폐하고 왜곡하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즉, 미학화되기 이전의, 혹은 미학화에 저항하는 정치의 본래적 성격이 무엇인지에 관한 물음이다.


버나드 크릭은 정치를 옹호함에서 정치를 “다양한 이해관계와 가치를 가진 집단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갈등을 평화적으로 조정하는 활동”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서 핵심은 갈등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정치는 갈등이 없는 조화로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갈등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적 갈등은 제거되어야 할 병리가 아니라 다원성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 가치관,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한, 갈등은 불가피하다. 정치의 과제는 이 갈등을 폭력이 아닌 방식으로, 완전한 해소가 아닌 잠정적 조정을 통해 관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갈등 조정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지루하고 지난하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를 “단단한 판자에 구멍을 뚫는 것”에 비유했다. 이 비유가 포착하는 것은 정치적 변화의 더딤과 그것이 요구하는 인내다. 사회적 변화는 대개 극적인 전환이 아니라 점진적 축적을 통해 이루어진다. 협상과 재협상, 부분적 양보와 부분적 획득, 불완전한 합의와 그 합의의 수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실제의 정치 과정을 살펴보면, 어떤 법안 하나가 통과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협상과 수정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있다. 원래의 제안은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에 부딪혀 수정되고, 수정된 안은 또 다른 반발에 부딪혀 재수정된다. 최종적으로 통과되는 것은 누구도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그러나 대다수가 수용할 수 있는 타협안이다. 이 과정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영웅적 서사의 재료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민주주의 정치의 실제 작동 방식이다.


정치적 결정은 거의 언제나 불완전하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한나 아렌트가 강조했듯이, 정치적 행위의 결과는 행위자의 의도를 넘어서며,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오늘의 해결책은 내일의 새로운 문제를 낳고, 그 문제는 또 다른 협상과 조정을 요구한다.


이러한 불완전성은 정치의 실패가 아니라 본성이다. 완전한 해결, 최종적 승리, 영구적 조화는 정치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정치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지금보다 조금 나은 상태”와 “갈등의 폭력적 폭발을 막는 것”이다. 이것은 초라해 보이지만,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결코 사소한 성취가 아니다.


요컨대, 정치는 본질적으로 미학적 만족을 제공하지 않는 활동이다. 오히려 정치는 대개 추하다. 원칙의 부분적 포기, 적과의 협상, 이상의 현실적 축소, 지지자들의 실망. 정치인이 “현실적”으로 된다는 것은 대개 이러한 추함을 감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추함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오는 추함이다. 나와 다른 이해관계,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들 역시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완전한 승리나 순수한 원칙의 관철은 불가능해진다. 타협은 패배가 아니라 공존의 조건이다.

뜨거운 미학 — 급진성의 낭만과 힙스터 정치

정치적 미학화의 첫 번째 유형은 급진성, 저항, 비타협의 이미지를 추구하는 형태다. 이 유형은 이른바 “힙스터” 문화의 논리와 구조적 유사성을 보인다. 힙스터 문화의 핵심은 구별 짓기, 특히 대중적인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다. 대중이 모르는 것을 알고, 유행 이전에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가 가치를 지닌다.


이 논리가 정치 영역으로 이식될 때 특징적인 현상이 발생한다. 널리 지지받는 정책은 그 자체로 의심의 대상이 된다. 대중적 지지는 “진부함”이나 “체제 순응”의 증거로 해석되고, 반대로 소수만이 이해하거나 지지하는 입장은 "깊이"나 "진정성"의 표지로 간주된다. 실현 가능성에 대한 고려는 “타협”으로, 타협은 “영혼 없음”이나 “원칙의 포기”로 번역된다.


이러한 구조에서 정치적 주장이 실제로 채택되어 주류가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주장의 가치를 훼손한다. 마치 인디 밴드가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 “변절”이나 “상업화”로 비난받는 것처럼, 정치적 입장의 대중화는 “순수성의 상실”로 애도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책의 실제 효과가 아니라 소수자적 위치가 제공하는 구별의 쾌감이다.


이 유형의 정치적 미학화는 앞서 기술한 정치의 본래적 성격, 즉 협상과 타협의 지난한 과정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협상은 “야합”이 되고, 타협은 “굴복”이 되며, 점진적 개선은 “체제 유지에의 기여”가 된다. 순수한 원칙의 완전한 관철만이 유일하게 수용 가능한 결과로 설정되며,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실패이거나 배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성은 환상이다. 다원적 사회에서 어떤 입장도 완전한 관철을 기대할 수 없으며, 기대해서도 안 된다.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한, 자신의 입장은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 순수성의 고집은 사실상 정치 자체의 거부이며, 이는 역설적으로 변화의 가능성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베버가 지적했듯이,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이것은 체념적 현실주의가 아니라, 주어진 조건 내에서 최선의 결과를 추구하는 실천적 지혜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급진적 미학은 이러한 지혜를 “비겁함”으로 경멸하고, 대신 실현 불가능한 순수성에 대한 충성을 미덕으로 삼는다.


이 유형의 또 다른 특징은 복잡함과 난해함에 대한 숭배다. 쉽게 설명될 수 있는 정책이나 주장은 “단순화”나 “환원주의”라는 혐의를 받는다. 반면 이론적으로 난해하고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담론일수록 “깊이”나 “진지함”의 증거로 여겨진다. 특정 사상가의 이름을 얼마나 유창하게 인용하는가가 정치적 신뢰도의 척도가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난해함은 진실의 보증이 아니다. 어떤 주장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그 주장의 타당성과 무관하며, 오히려 비판적 검증을 어렵게 만드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난해함의 숭배는 지적 엄밀성의 추구라기보다 지적 배타성의 과시에 가깝다.


더욱 문제적인 것은 실패에 대한 낭만화다. 이 구조에서 정치적 성공은 오히려 "체제에의 편입"이나 “원칙의 타협”으로 의심받는다. 반면 실패는 “순수”나 “비타협적 원칙”의 증거로 해석되어 일종의 도덕적 훈장이 된다. “우리는 졌지만 잘 싸웠다”는 위안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에서 실패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과를 수반한다. 어떤 정책이 채택되지 못했을 때, 그로 인해 개선되지 못한 삶이 있고, 해소되지 못한 고통이 있다. 실패를 낭만화하는 주체와 그 실패의 비용을 실제로 감당하는 주체가 일치하는 경우는 드물다. 실패의 미학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심미적 만족으로 대체하는 기제로 기능한다.


힙스터적 정치 미학의 또 다른 특성은 아이러니적 거리두기다. 힙스터 문화에서 무언가를 진지하게 좋아한다고 직접 표현하는 것은 세련되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한 발 물러서서, 약간의 조소와 함께 대상을 다루는 태도가 요구된다.


정치 영역에서 이 아이러니는 책임 회피의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 특정 입장을 강하게 주장하다가도, 그 입장이 비판받으면 “그저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 것일 뿐”이라며 후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어떤 입장도 끝까지 방어할 필요가 없다. 진지하게 몰입하는 것은 촌스럽고, 거리를 둔 냉소가 세련됨의 표지가 된다.


이 아이러니의 구조 안에서 정치적 책임은 희석된다. 그러나 앞서 논의했듯이, 정치는 본질적으로 책임을 수반하는 활동이다. 지루한 협상에 참여하고, 불완전한 타협을 받아들이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정치적 행위자의 조건이다. 아이러니의 갑옷은 이 책임으로부터의 면제를 추구하며, 이는 곧 정치적 행위 자체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차가운 미학 — 합리성의 자기도취와 테크노크라트 정치

정치적 미학화의 두 번째 유형은 앞서 기술한 유형과 표면적으로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급진성이나 저항의 낭만 대신, 냉철함, 합리성, 데이터 기반 판단의 이미지를 추구한다. “나는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로 판단한다”, “나는 이념이 아니라 실용으로 접근한다”, “나는 극단이 아니라 합리적 중도를 지향한다”와 같은 자기 규정이 이 유형의 전형적 표현이다.


이러한 자기 규정은 언뜻 미학과 무관해 보인다. 오히려 미학의 정반대, 즉 감정과 주관을 배제한 냉정한 이성의 영역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되는 것은 “합리적인 나”라는 자기 이미지에 대한 애착 자체가 하나의 미학적 포지셔닝이라는 점이다.


합리성과 냉철함의 이미지는 그 나름의 심미적 매력을 지닌다. 복잡한 현실을 깔끔한 지표로 환원하는 정돈의 쾌감, 감정적 호소를 배제한 건조함이 주는 우월감, 모든 것을 비용과 편익으로 계산하는 명료함의 숭배가 그것이다. 스프레드시트의 정렬된 행과 열, 그래프의 상승 곡선, “근거 기반”이라는 문구는 일종의 테크노크라트적 숭고미를 구성한다.


문제는 이 심미적 매력이 실제 합리성과 혼동될 때 발생한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로 합리적인 것” 사이의 간극이 은폐되는 것이다.


테크노크라트적 미학의 핵심적 문제는 정치적 갈등을 기술적 문제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앞서 논의했듯이, 정치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활동이다. 이 갈등은 “정보의 부족”이나 “비합리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다른 것을 원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나 테크노크라트적 관점에서 갈등은 일종의 오류로 취급된다. 충분한 데이터와 올바른 분석이 있다면 갈등은 해소될 수 있으며, “객관적으로 최선인” 정책이 도출될 수 있다고 전제된다. 정치적 반대는 무지나 이념적 편향의 산물로 간주되고, 따라서 설득이나 계몽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관점은 정치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오해한다. 가치의 갈등은 정보의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경제 성장과 환경 보전 사이의 긴장,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안전 사이의 긴장은 “더 많은 데이터”로 해소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에 관한 가치 판단의 문제이며, 그러한 판단에는 “객관적으로 옳은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테크노크라트적 미학의 두 번째 함정은 측정 가능성의 물신화다. 수치화할 수 있는 것만이 “객관적”이고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수치화할 수 없는 가치는 논의에서 배제되거나 부차화된다. 존엄, 공동체, 소속감, 의미와 같은 개념들은 스프레드시트에 입력되지 않는다. “데이터에 없으니 고려 대상이 아니다”라는 논리가 합리성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제임스 C. 스콧은 국가처럼 보기에서 근대 국가의 “고도 모더니즘적” 기획이 어떻게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된 도식으로 환원하고, 그 과정에서 지역적 지식과 맥락을 무시함으로써 재앙적 결과를 초래했는지 분석한 바 있다. 테크노크라트적 미학은 이와 유사한 위험을 내포한다. 측정과 계량의 명료함에 대한 심미적 선호가 현실의 복잡성을 억압하는 것이다.


또한 “효율적”이라는 단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무엇을 위한 효율인지, 누구의 관점에서의 효율인지는 이미 가치 판단을 전제한다. 그러나 테크노크라트적 수사는 이 전제를 숨기고, 마치 객관적 계산의 불가피한 결과인 양 정책을 제시한다. 정치적 선택이 기술적 필연으로 포장되는 것이다.


테크노크라트적 미학 역시, 급진적 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의 본래적 성격을 회피한다. 급진적 미학이 협상을 “타락”으로 거부한다면, 테크노크라트적 미학은 협상을 “불필요한 것”으로 우회한다. 올바른 답이 이미 계산을 통해 도출되었다면, 협상은 비합리적 저항을 달래기 위한 불필요한 의례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정치에서 협상은 단순히 “최적해”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협상 과정 자체가 정당성의 원천이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당사자들이 논의에 참여하고, 자신의 관점이 청취되었다고 느끼며, 최종 결정이 공정한 절차를 거쳤다고 인정할 때, 그 결정은 정당성을 획득한다. 이 과정을 생략하고 “객관적 최선”을 부과하려는 시도는 기술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정당성을 상실한다.


테크노크라트적 미학의 가장 심각한 함정은 “데이터”와 “합리성”의 독점 주장이다. 테크노크라트적 미학을 내면화한 주체는 자신이 합리성의 편에 서 있다고 자부하며, 이에 따라 반대 의견은 자동으로 “감정적-이념적-포퓰리즘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이 구조에서 정치적 토론은 불가능해진다. 상대방의 논거를 검토하고 반박하는 대신, 상대방 자체를 비합리성의 영역으로 추방하면 되기 때문이다. 토론은 사라지고, 계몽의 위계만이 남는다. “나는 합리적이고 너는 감정적이다”라는 선언은 논증이 아니라 권력의 행사다.


테크노크라트적 미학의 특수한 변종으로 “합리적 중도”라는 자기 규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포지션은 양 극단 사이에 서서 “나는 균형 잡혔다”고 선언하며, 이러한 균형을 탈이념적 성숙함이나 객관적 합리성의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중간”이 자동으로 “옳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두 상반된 입장의 중간 지점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한쪽이 맞고 한쪽이 틀릴 수 있다. 양비론은 판단의 회피일 수 있으며, “균형”은 기존 권력 배치를 자연화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더욱이 중도의 미학은 특유의 쾌감을 제공한다. 논쟁에 실질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논쟁 위에 서는 듯한 우월감, “저들은 싸우고 나는 관조한다”는 초연함이 그것이다. 그러나 앞서 논의했듯이, 정치는 본질적으로 갈등에의 개입이다. 관조의 포즈는 이러한 개입의 회피이며, 이는 사실상 현상 유지에 대한 묵시적 지지로 기능할 수 있다.

공통 구조의 분석

앞서 분석한 두 유형, 급진성의 뜨거운 미학과 합리성의 차가운 미학은 표면적으로 극명하게 대립한다. 전자는 후자를 “영혼 없는 관리자”나 “체제의 하수인”으로, 후자는 전자를 “현실 모르는 몽상가”나 “무책임한 선동가”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 상호 경멸에도 불구하고, 두 유형은 동일한 구조적 특성을 공유한다. 첫째, 두 유형 모두 정치적 입장을 자기 이미지 구성의 재료로 사용한다. 급진적 미학이 “깨어있고 비타협적인 나”를, 합리적 미학이 “냉철하고 균형 잡힌 나”를 추구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정책의 실제 효과보다 그 입장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정체성이 우선시된다는 점에서 구조는 동일하다.


둘째, 두 유형 모두 구별 짓기의 논리에 의존한다. 급진적 미학은 “뻔한 대중”과의 구별을, 합리적 미학은 “감정적 대중”과의 구별을 추구한다. 경멸의 대상이 다를 뿐, 자신을 어떤 열등한 타자와 구별함으로써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려는 욕망은 공유된다.


셋째, 두 유형 모두 정치를 일종의 취향 공동체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담론을 소비하고, 같은 코드로 서로를 알아보며, 같은 적을 조롱하는 집단. 정책의 효과에 대한 평가보다 소속의 확인과 동류 의식이 앞선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두 유형 모두 정치의 본래적 성격, 즉 지루하고 불완전한 갈등 조정의 과정을 거부하거나 회피한다는 점이다. 급진적 미학은 이 과정을 “타락”으로 규정하고 순수성의 영역으로 이탈하며, 테크노크라트적 미학은 이 과정을 “불필요한 것”으로 규정하고 기술적 해결로 대체하려 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결과는 동일하다. 실제로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을 이끌어내고, 불완전하지만 작동하는 합의를 구축하는 지난한 작업은 회피된다. 대신 남는 것은 자기 이미지의 유지와 동류 집단 내에서의 인정이다.


정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이 지루한 작업을 해야 한다. 법안을 수정하고 재수정하는 협상,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는 회의, 지지자들에게 타협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불편한 대화. 이러한 작업은 미학적 만족을 제공하지 않지만, 이것 없이는 어떤 변화도 실현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두 유형의 정치적 미학화는 공통적으로 특권의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를 미적 게임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적 위치를 전제한다. 정책의 결과가 자신의 삶에 직접적이고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람만이 “쿨한 급진성”이나 “냉철한 관조”의 자세를 취할 여유가 있다.


예컨대 특정 복지 정책을 두고 “미학적으로 불충분하다”고 비판하거나, “데이터가 불완전하니 판단을 보류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그 정책의 직접적 수혜 대상이 아니다. 정책의 부재나 지연이 자신의 생존에 위협이 되지 않는 위치에서만, 정치는 자기 이미지의 장식물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치의 미학화는 특권의 은폐 기제로 기능한다.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실은 결과에 대한 무관심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적 세련됨이나 이론적 순수성의 외피로 감추는 것이다.


미학과 정치의 올바른 관계를 향하여

이상의 비판이 정치에서 미학적 차원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그러한 배제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정치적 상상력에는 본질적으로 미적 차원이 포함된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비전, 정의로운 공동체의 이미지, 연대와 해방의 감정적 호소력은 순전히 이성적 논증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무미건조한 정책 목록만으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없다. 정치적 동원과 참여에는 영감과 열정의 차원이 필수적이며, 이는 미학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미학이 윤리와 실용을 대체할 때 발생한다. 즉, “이 정책을 지지하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물음이 “이 정책은 옳은가”, “이 정책은 효과적인가”, “이 정책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물음을 대신할 때 나타난다.


정치는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개입하는 행위다. 어떤 정책이 채택되거나 채택되지 않을 때, 그 결과로 개선되거나 악화되는 구체적인 삶이 있다. 정치적 선택에는 이러한 결과에 대한 책임이 수반된다. 그리고 이 책임은 급진성의 낭만으로도, 합리성의 자기만족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처방은 정치의 지루함을 인정하고 감내하는 것이다. 정치가 드라마틱한 승리나 깔끔한 해결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 협상과 타협의 과정이 미학적으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사실, 결과가 항상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체념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인식은 정치적 참여의 올바른 출발점이다. 지루함을 감내할 때만, 실제로 작동하는 변화를 위한 작업에 투신할 수 있다. 순수성의 환상이나 기술적 해결의 약속에 기대지 않을 때만, 타협과 협상의 어려운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베버가 말한 “단단한 판자에 구멍을 뚫는” 작업은 아름답지 않다. 그러나 이 작업 없이는 어떤 문도 열리지 않는다. 정치의 미학화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심미적으로 덜 매력적인 질문들을 다시 중심에 놓아야 할 것이다. “이 입장은 충분히 급진적인가” 대신 “이 입장이 실현되면 누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이 주장은 충분히 데이터에 기반했는가” 대신 “이 데이터가 포착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나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대신 “이 결정으로 인해 비용을 치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세련되지도, 쿨하지도, 냉철해 보이지도 않는다. 급진적 위반의 쾌감도, 명료한 계산의 만족감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가 자기 이미지의 무대가 아니라 공동의 삶을 구성하는 실천이라면, 이러한 질문들은 회피될 수 없다.

결론

본고는 정치의 미학화, 즉 정치적 판단의 기준이 심미적 고려, 특히 자기 이미지의 구성과 유지로 이동하는 현상을 검토했다. 이 현상은 급진성의 낭만을 추구하는 “뜨거운 미학”과 합리성의 자기도취를 추구하는 “차가운 미학”이라는 두 가지 대립적이면서도 구조적으로 동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두 유형 모두 정치적 입장을 자기 정체성의 재료로 사용하며, 정책의 실제 효과보다 그 입장을 취한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우선시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더 근본적으로, 두 유형 모두 정치의 본래적 성격—지루하고 불완전한 갈등 조정의 과정—을 거부하거나 회피한다. 또한 두 유형 모두 정치를 미적 게임으로 즐길 수 있는 특권적 위치를 전제하며, 이 특권을 은폐하는 효과를 낳는다.


정치에서 미학적 차원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미학이 윤리와 실용을 대체할 때, 정치는 자기 이미지의 브랜딩으로 전락한다. “멋있어 보이는가”라는 질문을 잠시 유예하고, “이것이 정말 옳은가”, “이것이 효과적인가”, “누구의 삶이 달라지는가”를 먼저 묻는 것.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지루하고 불완전한 협상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 이것이 정치를 정치로서 회복하는 출발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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