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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Politics of Identitiy

난징대학살과 기억의 정치의 중일관계의 연관성-텀페이퍼 내부에서 인용-

Fulton 2010. 6. 29. 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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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이 점점 와해되어가면서 일본의 다나카 정부는 중일관계 개선에 역점을 두었다. 1972년 중일 수교이후 중국정부는 기본적으로 일본과 우호적인 유지하려 하였다. 중일관계가 양 국의 지도부의 왕래로 개선되고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양 국은 서로의 접촉점이 증대되면서 점차 서로의 교류가 증대되었다.
 이렇게 교류가 증대되면서 서로의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상호간의 교류도 증가하였다. 여기에서 서로의 기억의 정치가 충돌이 발생하였다. 과거사에 대한 서로의 해석과 인식이 달랐기 때문에 결국 서로의 기억의 교류는 불일치를 가져왔다. 교과서 문제와 망언의 문제가 본격화 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냉전 시기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충돌의 여지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중일관계가 개선되면서 이런 문제는 양국관계에 있어 방해요소로 본격화 된다. 이는 과거사 문제가 냉전시기에 관계 개선이 개선된 한일관계에서 먼저 나타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기억의 정치의 충돌은 관계 자체가 단절되어 있을 때는 나타나지 않지만, 관계가 점차 증진되면서 기억의 정치의 충돌은 발생한 것이다. 1972년 베이징을 방문한 다나카 수상이 중일 공동선언문에 중국이 입은 심각한 피해에 대한 책임을 표명한 것에서 이러한 기억의 정치의 충돌은 분명히 예고되고 있었다.
 중국의 기억의 정치는 피해자로서 기본적으로 증폭의 매커니즘을 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체성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이데올로기가 먼저 채택되면서 기억의 정치는 억제되고 있었다. 하지만 냉전이 약해지고 문화대혁명이 끝나가면서 기억의 정치는 부활하였다. 기억의 정치가 부활하면서 중일관계의 증진에 있어 과거의 가해자로서 일본이 부각되었다.
 일본 역시 기억의 정치는 내재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은 과거사에 있어 가해자로서의 위치를 망각하고 있었다. 핵폭탄의 피해자로서의 기억과 가해자로서의 기억이 양립하고 있던 일본은 피해자로서의 의식을 부각하고 가해자로서의 의식을 망각하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억의 정치가 상호간의 모순을 증진하였다. 결국 일본에서 기존의 망각의 기제가 지속적으로 작동하면서 나타났던 일본 지도층의 ‘망언’과 교과서 문제가 대두하여다. 망언은 하나의 기억의 정치의 하나의 내러티브로서 기능하였다면 교과서 문제는 하나의 텍스트적인 재현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전쟁기억을 사회화 하는 과정에서 교과서는 추모와, 내레이션이 해석을 거치며 재현의 단계에 이르는 최종적인 단계로도 볼 수 있다. 더구나 일본에서의 교과서는 국가의 검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동시에 국가 기억으로서의 공식화 기능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다면, 교과서에 기술되는 난징대학살에 대한 서술은 일본의 공식적인 입장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당위성이 존재한다.
 1960년대 이후 태평양전쟁의 근본원인은 ABCD의 일본 포위20에 있었고, 태평양전쟁의 결과 아시아 여러나라들이 독립할 수 있었다는 소위 대동아전쟁 긍정론 등 수정주의가 대두하면서 난징대학살 부정론이 나타나게 됐고, 그 후 다시 실질적으로 학살 당한 민간인은 소수였다는 소위 학살 소수론으로 변질하는 등 난징사건은 끊임없이 논의의 쟁점이 되어왔다.21
 난징대학살에 대한 역사 교과서 문제는 1965년 부터 지속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역사교과서 문제가 중일관계에 있어 본격화된 것은 1982년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 검정의 문제였다. 당시 일본의 4대 유력 신문은 이 주제를 헤드라인으로 다뤘으며 중국과 한국 정부 역시 일본이 침략의 역사에 대한 기억을 망각 시켜 일본의 젊은 세대에 군국주의 부활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공식적으로 항의하였다.22 이는 일본 교과서 문제에서 난징의 문제가 고조된 것은 결국 중국과 일본의 양국간의 관계 증진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억의 정치는 중국과 일본 모두 내재된 채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것이 양국간의 문제로 확대되고 고조되는 중요한 기제는 양국간의 관계가 증진되면서 양 국이 타자를 인식하는 관념을 구체적으로 이미지로 만들어야 했고 이에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양국 관계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증폭의 공식화
 1982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파문으로 인하여 중국은 중일관계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기억의 정치를 작동하기 시작한다. 애국주의 교육을 촉발하였으며 동시에 1985년에는 베이징에 항일전쟁기념관 및 몇몇 박물관들이 개관하기에 이른다.23 여기에 있어서 중국은 기억의 정치의 측면에서 결국 난징대학살의 기억의 재현을 증폭하는 것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우선 논란의 여지가 있는 30만이라는 희생자 수치를 공식화하였다. 물론 이 30만이라는 수치는 기본적으로 전범재판 당시 등장하여 공인된 수치이긴 하다. 그러나 이는 공인되었다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30만에 육박할 것이라는 추정치 였다. 이러한 추정치를 공식화함으로서 난징대학살을 기존의 지방적이고 유족 위주의 기억에서 국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기억으로 공인하고 확대하였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은 이런 증폭의 공식화의 지속이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은 1차로 1985년 8월 15일 개관하였다. 1987년 12월 13일 난징대학살기념관 내 기념홀 개관식에 400여 명의 관료들과 피해가족, 그리고 시민들이 참석함으로써 기념관은 항일전쟁의 중국 국가적 기념장소로 탈바꿈하게 되었다.24  중일관계가 개선되고 교과서 문제가 최초로 대두하면서 난징대학살 문제는 첨예한 이슈로 등장하였다. 중국 정부는 정부적인 차원에서 생존자의 진술을 모으고, 동시에 외국에 있던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아놓은 자료에 난징에서 발굴한 자료를 더하여 난징대학살기념관을 개관하였다. 난징대학살기념관은 명백하게 중국이라는 국가차원에서 난징대학살의 기억의 정치를 증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1980년대까지 난징의 기억은 지엽적이었으며 중국의 국가정체성과는 거리가 있던 관념이었다. 그 전까지 중요시하게 여겨지던 기억은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의 기억과 마오쩌둥으로 상징되던 ‘홍기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일본과 교류가 확산되고 교과서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가 발생하면서 중국은 공식적으로 난징대학살의 기억을 국가의 기억으로 공식화하였다.
 중국이 난징대학살을 중국 공식의 기억으로 공식화하는 데의 함의는 중국의 국가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일본 지도층과 교과서 문제로 나타나는 과거사의 문제를 일본 국내정치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중일관계에 영향을 주는 근본적으로 국제적인 문제로 해석하였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외교 행태를 보여주었다. 중소 분쟁이나 다나카 정권기에 저우언라이와 다나카와의 회담을 통해서 양국간의 관계를 개선한 사례들은 결과적으로 중국의 국제정치에 있어서 기존의 국제정치이론들의 적합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어 왔다. 그러나 1982년 교과서 문제 이후 보여준 중국의 행태는 기존의 보여준 중국의 국제정치 행태와는 큰 차이가 존재하였다. 국제정치적 측면에서 기억의 정치가 작동하면서 일본 국내 문제로 해석할 수 있던 사항에 대하여 국제적 문제로 해석하고 이에 양국간의 차원에서의 대응이 이뤄지는 동시에 국내정치적으로도 기억의 공식화를 통해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행태가 나타났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중국에 있어 1982년 이후 난징대학살과 관련한 기억의 정치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적 특성을 모두 보여주었다.

망각의 증폭
 일본 내부는 과거의 기억에서 두 가지의 기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첫째는 강한 일본으로서 ‘성전’을 수행하던 일본 중심 사고의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으로 인한 피해자로서의 평화 지향의 기억이다. 이 두 가지의 기억의 존재는 일본이라는 국가정체성을 성립해 왔으며, 일본 국내 정치에서는 이 두 가지의 기억의 정치가 굉장히 오랜 시간동안 이뤄져 왔었다. 정치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정치를 기반하는 시민사회 내부에서는 두 기억의 정치가 심각히 작동하고 있었다.
 다나카 정부 이후 중국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서로의 교류는 점차 증대되었다. 교류가 증대되면서 일본은 전쟁을 정당화하던 내러티브가 지속적으로 작동해왔고 이러한 내용이 공식적인 발언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망언’이 바로 그것이었다. 망언은 기존에 일본사회에 내재되었던 과거의 가해자이던 일본을 정당화하거나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부정하는 내러티브가 나타난 것이다. 중일 관계가 증대되기 전까지는 이는 단지 일본 내부의 내러티브였다. 그러나 중일관계가 확대되면서 일본 내부에서 발생하던 내러티브는 더 이상 일본 국내만의 내러티브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중일간의 문제로 진행되고 확대된 내러티브에서 주요 화두 중 하나는 바로 난징대학살이었다.
 일본 내부에서는 기존에도 난징대학살에 대해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 이러한 목소리가 교과서 문제에 대해 중국이 외교문제로 확대하자, 자신들의 목소리도 그것에 대응하여 키워나갔다. 기존에는 기억의 정치에 작동하는 행위자가 우익정치인, 유족들 정도 였다면 이제는 일반 시민사회에서도 행위자로서 우익 시민단체와 일반 시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2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 문부성의 역사교과서 개입을 강력하게 비판하자, 일본정부는 사태 진화에 나서 이웃국가들의 정서를 존중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보수언론의 반격이 강화되자, 강력한 보수적 과거회귀 정책을 표방하는 나카소네 수상의 지원을 받는 가운데 역사교과서에서 난징대학살과 731부대는 부정되거나 주변적인 일화로 처리되었다.25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모순적인 현상을 일본에서 보이게 만들었다. 이른바 일본의 정당화를 목적으로 하는 아이덴티티는 ‘가해자로서의 일본의 망각’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망각은 전쟁에 대한 서술이나 목격담, 재현이 최소화되어야 사회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국제적인 문제가 되면서 기존에 존재하였던 내부로부터의 반박 뿐 아니라 국제적인 차원에서의 반발이 나타났다. 이러한 반발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더 큰 ‘침묵과 망각’이 아니라 ‘망각’의 내러티브를 증폭시켜야만 했다. ‘망각’의 내러티브를 증가하여 난징대학살에 대한 기억이 일본사회의 공론장이나 대중의 의식 속에서 주변적인 사건으로 남겨두는 것을 목적으로 망각의 내러티브를 증폭해야만 했다. 즉 가해자로서의 정당성을 호소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내러티브를 이전 보다 더 조직화해야 하고 개인의 기억이 아닌 집단의 기억으로 확장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과서같은 집단적으로 공인되는 차원에서의 자신들의 인식과 관념을 주입하여야 했다.
 일반적으로 전쟁을 치룬 국가들은 전쟁을 토대로 자기 긍정적 아이덴티티를 형성해왔다. 일본의 정당화 아이덴티티는 행위에 대한 필연성을 부여하여 일본이 치룬 전쟁을 상대화하여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희석시켜 왔다. 이러한 정당화 아이덴티티는 일본사회의 내부 통합과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교감을 증진시켜온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26 이런 정당화 아이덴티티에 기인하여 일본은 난징대학살에 대해 ‘망각’의 공유가 필요로 하였으나 난징대학살에 대한 인식이 단순히 국내정치 영역을 벗어나 중국과의 국제정치로 발전하게 되면서 ‘망각’을 지향하기 위해 ‘침묵’이 아닌 ‘증폭’을 선택해야만 했다. 이러한 ‘증폭’의 방법으로 이른바 정치인의 ‘망언’이 직접적인 내러티브로 나타났고 ‘망각’을 공인하기 위한 ‘증폭’으로 교과서 문제가 나타났다. 기획된 ‘망각’을 지향한 이러한 움직임은 다시 중국에게 반발을 가져왔고 이는 중일관계에 있어 해결되지 않는 악순환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충돌의 관리
 중국과 일본은 중일관계에서 자국의 기억의 정치를 지속적으로 증폭화하면서 양 국간의 외교적 문제는 지속되었다. 일본의 과거사 인식에 대하여 중국은 외교적인 문제로 확대하였고 이에 일본은 내정간섭이라는 반발을 하였다. 이는 일회적인 행태가 아니라 80년부터 200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충돌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이즈미 정부 시절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공식 참배를 문제를 삼아 우이 부총리는 예정된 회담을 6시간 앞두고 회담을 취소하고 귀국하는 외교적 결례를 보였다. 이는 고이즈미 정부의 과거사 인식을 외교적인 문제로 공식삼아 외교 분쟁으로 확대하는 중국정부의 인식을 명백화한 것이었다. 교과서 문제에 있어서도 중국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응하였다. 중국은 주일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하거나 주중 일본 대사에게 유감을 표명하는 등 기억의 정치를 국제정치로의 확대로 분명히 하였다.
 2005 년 4월에 촉발한 중국인들의 대규모 반일시위는 기억의 정치가 단순히 양 국의 지도층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교과서 문제와 망언, 야스쿠니 참배 문제가 겹치면서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은 폭발하였고 베이징, 상하이, 충칭, 난징 등지의 대도시에 반일시위가 폭발하였다.
 중국에서의 반일 시위는 근본적으로 중국정부가 개입 혹은 방조한 혐의가 짙다. 시위 자체의 통제가 가능한 중국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정부는 이러한 통제의 정도가 높지 않았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반일 시위에 뒤 이은 우이 부총리의 고이즈미 총리와의 회담 취소는 중국정부가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중국은 이러한 반일 시위에 대한 감정에 동의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민족적 감정이 중국의 외교정책의 방향을 결정하였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엄밀히 말하면 중국정부는 반일 감정의 폭발을 묵인하였고 이렇게 폭발한 반일 감정이 다시 중국정부의 외교 정책의 투영되면서 중국정부의 외교적 방향을 결정한 것이다.
 중국정부는 충돌의 관리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고 실제로 그래왔다. 반일시위가 증폭되자 중국의 외교정책 방향이 격렬해졌고, 이에 중국정부는 ‘증폭의 관리’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실제로 2007년 난징대학살 70주년 행사는 중국정부가 반일감정 자극을 우려 행사를 최소화하고, 행사 자체를 취소하는 등 반일감정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하였다. 일본을 향한 반성이나 사과요구도 하지 않았다. 또한 다큐멘터리 영화 ‘난징의 악몽’이 중국 내 상영이 중국공산당에 의해 전격 금지되었다.27 중국은 근본적으로 중일관계 자체를 과거사 문제로 해체할 생각은 없으며, 이를 관계 안에서의 분쟁으로 해석하고 있는 행태를 보인다. 물론 중대한 문제이지만 이는 일본과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해결해야할 문제이며, 이를 이유로 중일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줄 의사는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역시 이러한 외교적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보여준다. 일본 내부의 시민사회에서 이른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높지만 일본 정부 자체의 관리 자체도 작동하였다. 기시 노부스케, 나카소네와 같은 일본의 과거 전쟁과 직결되는 인물들이 총리에 앉기도 했지만 일본 역시 근본적으로 중일관계가 훼손될 정도로의 기억의 정치의 팽창을 시도하거나 원하진 않았다. 일본도 시간이 지나며 공식적인 ‘망언’의 강도나 회수는 줄어들었으며 중일관계를 자극하려는 행동을 점차 자제하기 시작했다. 본래 극우적인 성향을 강하게 보이던 아소 다로 총리 역시 총리로 집권하자 이러한 중일관계를 훼손할 염려가 있는 발언이나 행동을 최소화하였다.
 이러한 ‘관리’는 근본적으로 양 국가다 기억의 정치가 양국간의 주요 변수이긴 하지만 그것이 양국간의 관계 안에서의 다이내믹을 결정하는 변수이지, 중일관계 자체를 결정하는 변수가 아님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이미 형성되고 진척되고 있는 중일관계 자체에는 큰 변동이 있지는 않지만 중일관계 내부에서의 그 정도를 결정하는 변수임을 보여준다. 즉 양 국 정부 모두 난징대학살을 둘러싼 기억이 양국관계에서 중요한 변수이지를 알지만 그것이 양국관계를 결정하는 변수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지노선을 확인할 수 있다.

증폭의 내부화
 기억의 정치의 양 국가간의 충돌은 관리가 되면서 감소되었지만, 난징대학살의 기억을 증폭하는 입장에서나 기억의 망각을 증폭하는 입장에서나 증폭 자체의 다이내믹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즉 증폭의 방향과 강도는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지만, 증폭 자체를 강제하거나 제어할 수는 없었다. 또한 중국에 입장에서는 반일감정 자체를 완전히 거세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변수로 남겨둬서 다음 외교정책에 활용하는 것에 정책 다양성에 이점이 있었다. 일본에 있어서도 정당화 아이덴티티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양쪽의 기억의 정치는 내부적으로 증폭되었다. 즉 국제정치에서의 기억의 정치는 제어를 시도하였지만, 국내정치에서의 기억의 정치는 지속적으로 증폭되어왔다.
  중국의 난징대학살기념관은 꾸준히 확장되어 왔다. 1985년 8월 15일 1차개관을 한 이래로 1997년 난징대학살 60주년을 맞이하여 확대하여 2차 개관을 하였으며 2007년 70주년 기념일을 맞아 18개월의 공사 끝에 다시 확장하였다. 공사비 3.28억 위안이 투입된 기념관은 과거보다 3배나 넓은 규모에 달한다.28 난징 기념관은 이 처럼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는 중국 내의 기억의 정치의 증폭의 지속을 보여준다.
 사망자 수치에 대한 지속적인 증가 역시 기억의 정치의 증폭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난징학살기념관에는 계속적으로 30만이라는 사망자 수치가 강요될 정도로 나타난다. 사실 30만이라는 수치는 공인된 검증으로 나타난 수치가 아닌 도쿄극동전범재판에서 난징대학살에서의 피해자 수치로 나타난 수치였다. 여전히 사망자 수치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8만에서 50만까지 일본인의 주장을 베제하고서라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중국은 30만이라는 수치를 지속적으로 고집하고 있으며, 30만이라는 수치는 중국이 일본으로부터 당한 중대한 제노사이드이며 기억의 정치를 작동할 동력이자 원인으로 나타난다. 즉 사망자 수치가 중요한 것은 기억의 정치에 있어서 중국의 원한과 일본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수치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기억의 정치를 증폭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중국은 30만이라는 수치를 홍보하고 있다.
 일본의 ‘망각의 증폭’은 시민사회영역에서 활발하게 나타났다. ‘츠쿠루카이’로 나타나는 역사교과서 개정 운동이나 만화나 도서로 나타나는 개인 출판물에서 망각의 증폭은 크게 나타났다. 아시아에 있어 이른바 태평양전쟁은 정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일본에게 있어서는 ‘성전’이었다는 진술은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는 기존에 정치인들의 정치적 발언이나, 혹은 교과서 검정에서 이슈화 되던 것과 달리 시민사회와 개인 영역에서 뚜렷이 강조되었다. 이른바 ‘자유주의사관연구회’와 ‘츠쿠루카이’는 기존의 역사관을 ‘도쿄재판사관’, ‘코민테른사관’, ‘자학사관’, ‘암흑사관’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과거사를 정당화하는 역사관을 지속적으로 내러티브로 발산하였다. 기존의 교과서 문제가 교육관료와 정부에게서 발생한 문제였으나 일본 역사교과서 내용의 왜곡은 점차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증폭되면서 나타났다. 더 이상 관료나 엘리트주도의 정당화 아이덴티티와 이데올로기의 확산이 아닌 ‘망각의 증폭’은 시민사회 내에서 기획되고 확산되었다. 여기에 일본 국내 유력 정치지도자들이 가세하면서 ‘망각의 증폭’은 확산되었다.
 증폭의 내부화는 두 가지 함의를 남겼다. 첫째로는 기억의 정치가 국내정치에서 국제정치로 확대됨에 따라 기억의 정치에 대한 억제는 필요했지만 그것에 강제적인 억제는 완전하게 불가능함을 의미했다. 둘째로는 중국과 일본이 기억의 정치에서 국제정치와 국내정치에서의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기억의 정치의 이중성이 국제정치와 국내정치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국가라는 행위자는 단일하지만 이러한 국가간의 벌어지는 국제정치에서의 기억의 정치와 국가 내부에서의 기억의 정치가 서로 상이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증폭의 내부화가 보여주는 중요한 함의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기억의 정치의 대립이 해결될 수 있기 보다는, 양 쪽다 완전히 기억의 정치를 망각하지 않는다는 가정에 있어서 기억의 정치의 대립은 해결되기 보다는 양 국관계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할 것을 의미한다. 즉 기억의 정치의 대립은 협상이나, 한쪽의 사과로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책 관리의 차원으로 지속될 개연성을 보이고 있다.

 난징대학살은 아시아에서 발생한 제노사이드로서 가해와 피해가 명확한 사건이었다. 전범재판을 거쳤지만 그것은 일본이 난징대학살에 책임이 있음을 규명했을 뿐 그것이 모든 난징대학살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처벌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해와 피해의 사실은 기억이라는 가공을 거치며 기억의 정치로 발전하였다. 중일 수교 이후 80년대 들어서 난징대학살은 중일 사이에 풀어야 할 숙제가 되었다. 일본은 기존에 전쟁을 정당화 하려는 아이덴티티가 중일 수교 이전에도 그랬듯이 지속적으로 작동했지만 더이상 이러한 아이덴티티의 발현에 의한 내러티브는 단순히 일본 국내 정치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중국은 일본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난징대학살의 기억을 국가적 기억으로 공식화하고 난징대학살의 기억을 증폭하였다. 중국이 이렇게 난징대학살의 기억을 증폭하자 일본 역시 망각을 목적으로 한 자신들의 내러티브를 증폭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중일간의 외교문제로 확산되었다.
 난징대학살의 기억의 정치가 중일간의 외교 분쟁으로 확산되자 중국과 일본은 서로가 자신의 기억의 정치를 국제정치의 수준에서 억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어의 수준은 국제정치의 수준에서만 가능하였고 국내정치에서는 오히려 증폭이 더욱 지속되었다. 이는 기억의 정치의 본질이 본래 중일간의 관계의 문제가 아닌 양국의 국가정체성의 기획의 문제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중국이 국가정체성 안에 난징대학살이라는 이슈가 중대화되고 일본이 전쟁의 정당화 아이덴티티를 소거하지 않는다면 기억의 정치의 대립은 지속될 수 밖에 없다. 이미 기획된 국가정체성에 대한 제거는 기존의 국가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보다 더 많은 자원과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하며 이는 거의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다.
 궁극적으로 중일간의 과거사 문제는 앞으로도 지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단순히 국가간의 협상이나, 한 국가의 단념, 한 국가의 사과로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기억의 정치는 작동하고 있고 이를 관리할 수 있을 뿐이지 국가는 이를 정부간의 정책과 노력으로는 해결하기 용이치 않다. 새로이 등장한 일본의 민주당 정권이 과거사 문제에 대해 국내적 내러티브를 억제하고 제어할 뿐이지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점에서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 역시 권위주의 사회주의 국가의 국가적 통제력으로 이를 억제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난징대학살이라는 제노사이드가 초래한 기억의 정치가 중일관계의 다이내믹을 설명하는 변수는 되지만 중일관계는 결정하는 변수는 되지는 못한다. 그러나 중일관계에 있어 안정을 기하기 위해 기억의 정치를 아예 거세하는 것은 국가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며 다만 이를 제어할 뿐이다. 이는 기억의 정치의 지속성의 능력에 달려 있으며 기억의 정치가 지속하는 한 여전히 양국 관계에 강한 영향을 주는 시한폭탄은 살아 있는 셈이다. 기억의 정치가 주조하는 국가정체성의 능력은 이처럼 국가의 능력을 상회할 수도 있다. 기억의 정치는 분명 국제정치와 국내정치에 모두 주요한 변수가 될 수 있고 이를 주목해야만 하는 이유를 제노사이드로서의 난징대학살에 관한 기억의 정치는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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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화, 김명섭, “기억의 국제정치학 :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와 동북아시아”,『사회과학논집』제 38호 제 1권 (서울 :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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