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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네딕트가 학문적 차원에서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는 루스 베네딕트가 문화인류학의 기반 위에 쌓아 올린 그의 저술이 궁극적으로 다른 학문들의 방향에도 크게 영향을 미침으로서 문화인류학을 기존의 민속지학에서 한 단계 더 끌어 올리고, 사회과학의 학문 분파로서 자리를 명백하게 잡게 하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회과학 내의 다른 학문인 정치학이나 사회학, 심리학과는 별도의 배경에서 출발한 문화인류학이 사회과학 내에서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루스 베네딕트의 공이 적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문화의 패턴』이라는 베네딕트의 저술은 사실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국화와 칼』의 준하며 혹은 그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저작이다. 이 책은 사실 정말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문화라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 수 있는 책이고 문화가 다른 관념들과 어떻게 관계를 가지는 지에 대해서도 매우 잘 드러낸다. 또한 문화적 상대주의가 왜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해서 매우 강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사회에서의 부적응자와 소수자가 문화 상대론적 관점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를 설명한다. 저자 베네딕트 스스로가 사회에서는 소수자였기 때문에 더더욱 의미를 가진다.
『문화의 패턴』의 7장과 8장은 정말 가치 있는 챕터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사회의 성격이라 이름 붙여진 7장은 앞의 챕터에서 분석한 부족들을 분석하는 동시에 이른바 서구 문화가 시대를(세계가 아니다.) 지배한 근대에 동시에 투영한다. 문화간의 극단적인 차이에 대해서 루스 베네딕트는 결국 다음과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 사회의 이러한 목적과 수단은 또 다른 사회의 관점에 의해서 판단 될 수 없다. 본질적으로 그것들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325)
일종의 이것은 분파적 도피로도 보이지만, 실상은 그것이 아니다. 이러한 결론에 베네딕트가 도달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말을 빌려보자면 다음과 같다.
현대 사회학에 인류학적 문화영역을 적용하려는 노력은 별로 유익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다양한 생활 방식은 오늘날 주로 공간(지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문화 영역의 개념”에 대해 시간을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런 “개념”은 없다. 특성들이 지리적으로 분류될 때, 그것들은 지리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느슨한 경험의 범주에 불과한 것으로부터 보편적 원칙을 만들어내려는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333)
결국 문화적 관념 범주를 만든 다는 것은 시간, 지리, 언어와 같은 관념의 총체를 형성해야 하는 데 이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베네딕트의 문화상대론은 문화의 우위가 없다는 관념적 비우위론이 아니라 문화 자체가 비교 불가능한 논리체계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기 때문에 문화의 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순히 객체적 우위성으로 문화의 우위를 판별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된다. 그런 상황에서 기존 사회과학에 대해 루스 베네딕트는 크게 반발한다,
반면 사회학자들은 우리 서양의 표준화된 문화를 다루면서 그들의 연구에서 불필요한 방법론은 말살해 버리려고 했다.(335)
문화인류학이 바라보는 세상은 그럼 무엇인가? 베네딕트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사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베네딕트의 말 이상을 덧붙일 필요를 잘 못 느끼겠다.
사회 관습을 연구할 때 문제의 핵심은 연구 대상의 행동이 사회적 수용이라는 바늘귀를 통과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광범위한 의미에서 역사만이 사회적 수용과 거부를 설명할 수 있다. 문제로 떠오른 것은 심리만이 아니고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는 결코 내성으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의 나열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경쟁 심리에서 경제제도가 나왔다는 얘기, 인간의 호전성에서 현대전쟁이 생겨났다는 얘기, 기타 잡지와 현대의 저서에서 만나는 갖가지 설명들은 인류학자에게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336)
인간의 행동이라는 측면만 가지고 문화를 해석하는 것은 난점이 있다. 그 난점은 그것이 심리적 해석이라는 데서 생겨나는 게 아니고, 역사적 과정 그러니까 어떤 문화적 특징의 수용이나 거부의 과정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337)
이러한 베네딕트의 기존의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은 예리하다. 이러한 베네딕트의 비판은 탄탄한 질적 방법론을 깔고 있으며 이러한 바탕에서 오늘 날 문화인류학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다. 위의 서술에서 나타나듯이 베네딕트는 사회과학에서 등장한 행태주의적 흐름에 대하여 강한 반발을 하였고 그것이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문화를 설명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즉 행태주의적인 사회과학에서 바라볼 때의 사회는 문화적 요소가 결여된 사회일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그 점에 있어서 필자는 베네딕트의 비판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분포되어 잇는 커다란 스펙트럼은 너무나 방대하고 모순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 스펙트럼을 대부분 활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먼저 선택을 해야만 한다. 선택하지 않는다면, 어떤 문화도 이해 가능한 패턴을 형성할 수 없다. 어떤 문화가 이 스펙트럼 중 어떤 것을 선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의도는, 테크놀로지의 구체적 세부사항이나 결혼 의례의 세부 절차보다 훨씬 중요하다. (343)
앞의 비판이 문화인류학 밖에 있는 사회과학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위의 서술은 베네딕트가 문화인류학에 있어 문화연구가 어떠한 방향과 방법론으로 연구되어야 하는 지에 대한 제시라고 할 수 있다. 문화에 대한 총체 연구보다는 즉 스펙트럼의 선택을 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문화의 패턴을 읽어내야 하는 것에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7장이 문화인류학의 가치에 대한 루스 베네딕트의 설명이었다면 8장은 엄밀히 말해 문화인류학의 분석이 현재, 베네딕트가 살던 세상, 즉 서구를 바라봤을 때의 함의적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서구의 관점에 있어 지난 2000년 동안 중요한 화두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였다. 이는 근대에도 중요했고 지금도 사회과학에서는 중요한 화두다. 베네딕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회의 본질에 대한 기본적 개념에서 볼 때, 문화적 패턴과 개인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느냐는 인류학의 논쟁은 사소한 파문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와 개인을 근본적 대립관계로 보는 이 시각은 철학과 정치의 기본 개념으로 확장할 때 더욱 순진한 개념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사회는 어떤 제한된 상황에서만 규제를 할 뿐이고 또한 법률은 사회 질서와 동의어가 아니다. 단순한 동질적 문화의 경우 사회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 집단 습관이나 관습으로 충분하고 법률의 형식적 권위를 발전시키지 않는다... 이 채겡서 논의한 바 사회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과 떨어질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어떤 개인도 자신이 참여하는 문화가 없다면 출발점에 설 수 없다. 거 꾸로, 어떤 문화도 결국에 가서는 개인이 공헌하는 요소들로 구성된다.(363)
여기에서 베네딕트가 인식하는 사회는 문화를 배제할 수 없는 사회를 말한다. 즉 원시 사회에도 문화가 있고, 복잡한 문명 사회에도 문화가 존재하듯이 사회에는 문화가 존재하며 개인과 사회는 문화라는 요소에 있어서 불가분인 동시에 대립적 관계일 수 없다는 것이 베네딕트의 설명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개인과 사회를 객채화하여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경고라고 볼 수 있다.
베네딕트는 마지막으로 사회의 소수자 및 부적응자에 대하여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문화인류학적 고찰을 통한 시각을 제시한다. 즉 책의 앞 챕터와 7장과 8장에서 드러나는 함의를 통해 문화인류학적인 학문체계가 실제적 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동시에 베네딕트라는 학자가 사회적 소수자였다는 점에서 분명 의의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의 문명은 우리의 목전에서 사라지는 문화적 기준과, 멀리 지평선에서 새롭게 올라오는 기준을 동시에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키운 도덕성이 문제가 될 때에도 기꺼이 정상성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기존의 도덕관을 확고하게 지키면서 도덕적 문제를 다루기가 어려운 것 처럼, 불가피한 생존의 필요성과 지역적 정상성을 동일시하면 인간 사회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기가 어렵다. (387)
우리는 사회 적응 능력의 관점에서 개인을 살펴봤다. 이 사회 적응은 임상적으로 정상성을 정의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또 고정된 징후를 가지고 정상성을 정의하기도 하고, 통계적 평균치를 가지고 정상을 정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나 이 평균치는 연구실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그 수치에서 벗어나면 비정상으로 정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391)
여기에서 등장하는 정상성의 개념은 사실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다른 학문이 도덕성, 덕성, 윤리성에 집중하여 윤리체계를 설명하지만 베네딕트는 문화인류학은 정상성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는 그래서 두 가지 실질적인 대책을 제시한다.
첫째, 현 제도의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더욱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자신의 일탈을 좀 더 침착하게 다루어야 한다.둘째, 환자의 자력경생에 발맞추어 비정상적인 유형에 대한 사회의 관용이 더욱 커져야 한다. 이 방향에서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전통은 환자 못지 않게 신경증적이다. 우발적인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그것에서 벗어날까봐 몹시 두려워 하는 사회의 성향은 정신병자의 성향과 별반 다를 바 없다.(388~389)
여기서 베네딕트의 전통과 부적응자의 관계에서 도출되는 문제에 대한 서술은 참 재미있다. 즉 기존의 문화의 신경증적인 부적응일 수도 있는 경우에 있어서 그 만큼의 전통도 신경증적이라는 서술은 단순히 부적응의 문제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에서의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개인과 사회과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설명의 연장선상에서 베네딕트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어떤 문화가 가치의 목표를 더 높이 설정할 수록 비정상으로 치부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날 것이다. (391)
개인적으로 간결한 이론을 참 좋아한다. 그런 점에서 베네딕트의 이 명제는 문화인류학적인 사고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좋은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문화인류학적인 설명의 복잡성을 넘어 그 통찰의 깊음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베네딕트라는 학자가 가지는 학문의 깊이는 사실 『국화와 칼』이 잘 보여주지만 그 진수는 필자의 견해로는 『문화의 패턴』에 있다고 단연히 말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적인 설명이 무엇인지를 시작하여, 문화에 대한 분석과 사례 설명, 그리고 문화인류학의 방법론과 기존의 사회과학 방법론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에 대한 실제적 적용까지 베네딕트라는 사람이 가지는 학문적 진수는 사실 『문화의 패턴』에 다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베네딕트가 문화 상대론을 강조하는 인용을 덧 붙이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현대의 사회사상은 문화적 상대성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없을 것이다. 사회학과 심리학의 분야에서 특히 그러하다. 인간들 사이의 상호 접촉과 변화하는 기준을 다루는 현대 사상은 건전한 과학적 방향이 몹시 필요하다....문화적 상대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그 가치가 반드시 절대주의 철학과 일치해야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문화적 상대성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그 안에 본질적인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옹호하는 제도를 혼란 속으로 빠뜨릴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적 상대성을 관습적 신념으로 받아들이자마자 그것은 선량한 생활의 또다른 믿음직한 방패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더 현실적인 사회적 신념에 도달하고, 인류가 생존의 원자재에서 자신을 위해 만들어 냈던 공존하면서도 유효한 삶의 패턴을 희망의 토대와 관용의 새로운 기초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395~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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