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팡테옹
이번 파리 여정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부분은 국가영묘에 대해서였다. 한국의 국가영묘라고 한다면 현충원이다. 한국의 현충원에서 이뤄지는 문제는 한국의 국가기억에 대한 문제들이 드러나는 현장이며, 정치적 논란의 장의 연속으로서 현충원의 논란들은 나타난다. 다만 이는 영묘로서 현충원이 그리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능한 문제이다. 만들어지고, 고정되어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논쟁으로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런던의 웨스터민스터 사원
영국의 영묘라고 한다면 웨스터민스터 사원이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써주었던 힐버트의 말을 특별히 인용하지 않더라도,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런던에 위치한 세인트폴 성당과 마찬가지로 영국의 국가적 추모 시설인 국가영묘라고 할 수 있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은 영국의 중세 시대의 왕들부터 문인, 음악가, 군인, 정치가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이는 세인트폴 성당도 비슷하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는 국가적 추모시설이 어떠한 분리 없이 총체로서 국가영묘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직업 별이나 업적 별로 나눠져서 추모가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 총괄해서 웨스터민스터 사원과 세인트폴 성당에서 기념과 추모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영국의 국가영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시인의 방 같은 이른바 ‘구역’의 개념은 존재하지만, 그 구역은 무조건적으로 지켜지는 것도 아니며, 사실 왕가의 무덤 정도만 분리되어 있을 뿐 대부분 기념의 총체로서 공간의 기능은 작동하고 있다. 그리고 공간의 입구에는 무명용사의 기념물이 놓아져 있음으로서, 이곳이 국가이념을 상징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파리 앵발리드의 포슈의 무덤
파리에서 충격 받은 부분은 영국과 극단적으로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프랑스는 국가영묘로서 팡테옹이 존재한다. 팡테옹은 그러나 웨스터민스터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셔져 있지도 않으며, 극히 소수가 존재한다. 그리고 군인보다는 민간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른바 사회지성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포슈 원수 같은 전쟁영웅들은 앵발리드에 존재한다. 앵발리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의 무덤인 동시에 다른 전쟁영웅들을 기념하는 역할을 하며 더불어 전쟁 기념관과 샤를 드골을 기념관도 함께 존재한다. 영국으로 치자면, 처칠 벙커와 제국전쟁박물관, 세인트폴 대성당을 겸하고 있다고 봐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수는 파리의 공동묘지에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페르라쉐즈, 몽파르나스, 몽마르트에는 이렇게 기념할 만한 인물들이 적지 않다. 이는 다르게 설명하자면 국가적 기념을 하지 않거나, 혹은 그것을 거부했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 또한 무명용사의 기념물은 이러한 국가영묘가 아닌 개선문(에뚜왈)에 1차대전의 무명용사만을 제한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이를 정리하자면 프랑스의 국가영묘는 영국의 것과 비교하면 분절적이고, 제한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군과 민간의 기념과 추모의 공간이 분리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파리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의 레이몽 아롱 가족 묘역
근거를 설명한다면, 프랑스는 우선 기억의 내러티브가 사회 전반에서 분절적일 개연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2차대전 당시 전쟁 내각은 비상시국을 담당하는 내각으로서 연립 정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는 이와 달리 드골의 자유 프랑스와 다른 레지스탕스, 거기에 비시 정부까지 다양한 층위의 기억의 서사 문제를 가진다. 2차대전뿐 만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시각에서부터 보나파르트의 대한 입장에까지 다양한 서사가 충돌할 개연이 크다. 이에 비해 영국은 전 후 보수당과 노동당의 대립이 심화되기 전에는 국가 서사의 충돌이 프랑스만큼 근대화 과정에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국가영묘의 분절과 제한적인 기능이 국가 서사의 충돌을 가져올까? 그것은 아닐 것이다. 국가 서사가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크다보니 그것에 대한 타협으로서 상징적인 국가영묘들을 분절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에서 당연히 그 기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이는 최소주의적인 기념과 추모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러한 기념과 추모에 대한 부정과 거부가 나타날 가능성도 크다. 즉 국가서사로 볼 수 있는 집단기억의 충돌이 국가영묘의 제한과 분절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그리고 이어지는 기념과 추모를 통해 확대 재생산될수 있다.
파리 앵뚜왈 개선문의 1차대전 무명용사 기념물
프랑스는 파리 코뮌, 드레퓌스 사건, 식민지 전쟁 등 국가 서사에서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을 여러 겪어 왔고 이런 과정에서 프랑스의 국가서사는 분절되어 왔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영묘의 기능은 제한적이고 분절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일종의 절충으로서, 유일하게 국민들의 논란을 피하면서 국가영묘로서 기능을 할 수 있는 최대로서의 결과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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