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의 역사문제 중 하나의 이슈이다. 그러나 이 이슈가 다른 이슈들과 동질성이 큰지, 혹은 특별한 경우인지에 대해 묻는다면 이질성이 크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문제이다. 정신대 문제에서 위안부 문제가 등장한 것은 90년대 초였다. 김학순 할머니의 말로 촉발된 위안부 문제는 다른 과거사 문제와는 심각히 다른 성격 하나를 가진다. 교과서 문제, 야스쿠니와는 달리 이는 명백한 전쟁범죄이고 이러한 비인륜적인 문제는 한일기본조약에 애당초 포함되지 않았던 문제였다. 또한 이는 단순히 한국만이 피해자가 있는 국가가 아니었고, 태평양전쟁기의 일본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전 지역의 대부분의 국가에 피해자가 있는 글로벌한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가 호명된 이상 일본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다른 역사 문제와는 달리 이 문제가 언급되고 3년이 되지 않아서 가토 장관과 미야자와 총리 그리고 무라야마 총리까지 이 문제에 대하여 사과와 보상에 방식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시기가 일본 정치사에서 자민당의 장기집권이 무너지던 시기이고 동시에 비자민당이 정권을 잡은 시기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일본은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동인을 국가 내부에서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성과 사과요구가 계속되자 일본 내에서는 ‘대체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는가?’라는 목소리와 ‘정말 우리가 잘못했는가?’라는 두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일관계가 어느 정도 이제 안정성을 보이던 DJ 정권를 넘어서 노무현 정권, MB 정권에 이르자 위안부문제에 일본은 극심한 피로감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이러자 일본에서는 단순히 사과를 할 것이 아니라 종결지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MB 당시의 민주당 정권은 진지하게 이 문제에 대해 법적인
사과와 보상을 하는 것도 검토하였고, 아베 정권이 등장하자 이 문제를 종결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권
내에 팽배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두 가지의 보이스가 정부 내에서 나왔다. 하나는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책임이 없거나 이미 책임을 졌다는 목소리, 하나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목소리였다.
여기에서 미국의 입장이 겹쳐진다. 부시 정권 때만하더라도 미국은 이러한 동아시아의 역사 문제는 양국의 문제이고 미국은 개입을 회피해왔다. 그러나 오바마 정권이 등장하면서 동아시아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지면서 역사문제의 수습 및 해결을 필요로 했다. 방일한 당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게이츠 국방장관은 야스쿠니와 대치되는 기념물인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역을 참배하고 역사문제에 있어서 일본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셔먼 국무부 차관이 역사문제가 정치적 이유로 동원하는 경우가 있다며 한국과 중국에게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역사문제의 책임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하여 책임의 초점을 돌렸다. 이를 종합해서 보자면, 미국은 결국 역사문제가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최소화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미국과 일본은 상호간에 이익이 겹치는 부분이 존재한다. 다른 역사문제의 이슈와는 달리 위안부 문제에서는 앞의 글에서 언급한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할 수 없는 ‘화해’나 ‘반성’의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합의’로 유도하고 싶은 것이다. 더불어 그 합의는 일본과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편이 좋다. 단 위안부 문제가 가지는 반인륜/반인권적인 문제라는 것을 고려해본다면 어떻게든 일본의 사과는 높은 수준이어야 했다.
결국 일본의 국내정치, 미국의 지역에 대한 의도가 겹치면서 일본의 협상 목표는 이번의 합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협상이어야 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가장 극우적인 목소리인 위안부 부정론을 만족하진 못하지만 최소한 ‘사과’에 피로를 느끼는 여론에 대해 만족을 시켜야 했기 때문에 일본은 ‘최종적’과 ‘불가역적’이라는 말을 반드시 입안해야 했다. 이것이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번 ‘합의’에서 반드시 입안해야 했다. 그리고 미국의 지속적인 압박은 한국에게 있어서 위안부 문제를 화해나 반성으로 유도하기 보다는 합의로 선택지를 좁히는 국제정치적인 배경이 되었다.
결국 이 문제가 합의로 이르게 된다면 합의에서는 ‘최종적’과 ‘불가역적’은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합의의 장이 열렸을 때 그것을 깬다면 여전히 현재의 미국 정부의 입장과 배치된다는 부담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최종적’과 ‘불가역적’이라는 어휘를 피할 수는 없었다. 여기까지는 한국에게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문제에서의 고민은 ‘최종적’과 ‘불가역적’을 주고 무엇을 받는지의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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