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방향이 다른 이야기이지만, THAAD 관련 논문을 쓰면서 THAAD 도입에 대한 여러가지 상황에 대해 한반도 THAAD 배치의 타당성에 대해 분석해봤다. 그러나 한 상황에 대해서는 타당성 분석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주한미군이 THAAD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안보는 많은 부분 한미동맹의 확장억지력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동맹에 대한 안보 이익의 반대 대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국가자율성이 된다. 이러한 동맹 구도는 한미동맹뿐만 아니라 미일동맹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이 동북아에 깔아둔 동맹의 차륜구조는 냉전기에도 그리고 지금도 동북아의 국제정치구조의 기본적인 구조가 된다. 즉 한국이나 일본이나 국가자율성에는 어느 정도 제한이 걸려 있게 되고 이는 정책 결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책결정분석틀 (출처 : Daniel Kaufmanm, 1985, U.S. National Security: A framework for Analysis, p.5.)
위 그림은 정책이 결정되는 과정에서 가치(국가가치), 국내환경, 국제환경이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대한민국의 국가 자율성이 안보문제와 연결되어 있을 때는 제한되는 정도가 크며 이 지점에서 국내환경과 국가가치의 측면보다 국제환경이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국의 Pivot to Asia 정책, 남중국해 분쟁 등을 통해 미국은 이 지역에서의 동맹국의 협조를 필요로 하게되었다. 이전에는 미국과 각각의 동맹국의 협력만으로도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의도를 투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중국이 부상하면서 미국은 단순히 자국과 동맹국의 협력 강화뿐만 아니라 동맹국의 협력 강화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미국의 아시아에서의 동맹구조는 다음과 같은 차륜구조와 같다. 미국이 허브의 위치인 G에 놓이고 한국과 일본과 같은 미국의 동맹국들은 각각의 A,B,C...F의 자리에 위치한다. 그동안의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대외정책구조이자 동맹구조인 차륜구조는 이제는 동맹국들간의 연결도 강조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점이 미국이 그동안 안하던 역사문제에서의 관여를 선택하게 한 것이라 생각한다. 힐러리 클린턴이 치도리가후치 묘역에 간 것은 자국의 국내정치에서의 역사문제를 동원함으로서 지지를 호소하던 아베에 대한 경고였다. 그리고 Sherman 차관의 ‘값싼 박수’ 연설은 한국에 대한 어느 정도 경고를 하는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 이미 한국은 한일정보보호협정을 국내의 여론 때문에 무산된 바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역사문제가 작동하고 있었고, 이른바 동북아의 현실정치로서의 한미일 공조가 시급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역사문제가 이를 방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분명 한국에게도 압력을 가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된 이상 정부의 입장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좁아졌다. 일본의 협상 방식은 법적책임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배수의 진으로 치고 나왔고, 이를 걷어차는데 미국의 눈치를 봐야했다면 한국의 선택은 우선은 합의를 해야 했지만 이른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책임을 일본에 걸 수 있는, 그리고 한국이 일본이 요구하는 것들을 최대한 회피할 수 있는 합의로 진행해야 했다. 합의를 걷어 찰 수 없다면 한국 혼자서만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걸려줄 이유는 없었다.
사실 한일관계에서 역사문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신의 원인은 사과 이후의 나오는 사과와는 전혀 다른 발언, 즉 ‘망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한일관계에서 역사문제에서 거의 대부분의 선제적인 촉발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존재하는 데 사실 이러한 ‘망언’을 함으로서 국내정치적인 자기PR과 내셔널리즘적인 지지를 동원하는 효과에서 기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망언’의 수혜를 제대로 받은 정치인이 전 도쿄 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와 오사카 시장인 하시모토 도루였다.
만약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책임을 일본에도 걸 수 있다면 일본의 이러한 정치지도자 망언에도 걸 수 있음이 분명하다. 서로간의 상호조건적인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계약이 된다면 사실 이를 깰 확률이 높은 행위자는 일본의 전반적인 생각인 반일 여론에 흔들리는 한국 정부가 아니라, 국내정치적인 동원을 위해 ‘망언’을 던지는 일본 정치 엘리트일 개연이 더 크다는 것이다. 즉 한국의 입장에서는 모호하고 수준이 낮으면 국내의 여론의 반발을 각오해야 할 합의 내용이지만 상호조건적인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는 결국에는 굉장히 깨지기 쉬운 역사문제의 ‘결빙’으로서의 합의로서 결과를 도출한다면 한국에게는 나중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한국의 최종 마지노선은 고노담화였다. 한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고노담화를 준수할 것을 일본 정부에게 촉구했고, 따라서 고노 담화의 내용이 이번 합의에 반영되어야 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나아가야 한국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법적 책임과 도의적 책임의 사이의 굉장히 모호한 ‘일본군이 관여했고’, ‘일본 정부가 통감해야 할’ 책임이 되어야 했다. 여기에 고노 담화 이후에 제시된 아시아평화기금 수준의 배상이 제시되어야 했고 이에 간접적이고 우회적이었던 정부의 출자가 근간이 되는 아시아평화기금과는 달리 일본 정부가 직접 출자하는 재단의 설립이 명시되었다.
혹자들은 청와대의 의도가 강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한일관계에 있어서 정권 후반기에 그것도 선거철을 앞두고 누가봐도 반발이 예상가능한 선택을 하는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영삼, 노무현, 이명박 정권 모두 정권 후반기에는 일본에 대한 반일 정서를 드러내 왔고, 실제로 일본 학계는 한국의 단임 대통령제 특성상 반일 감정이 정치에 동원된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책 결정과정에서 국내환경 중 정치지도자, 즉 청와대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것은 왜 그럼 이 시점이어야 했는가를 설명하지 못하는 약점을 보인다. 그리고 대외정책결정에서 생각해볼 때는 국내환경보다 국제환경이 언제나 한국과 같은 非강대국에게는 더 중요한 변수였다. 이러한 변수를 배제하고 무조건 국내환경에서 이러한 변수를 찾아내려고 하는 분석은 분석의 폭을 뒤틀어 버리게 된다.
유리하지 않은 지형에서의 싸움은 언제나 피해야 한다. 그러나 피하지 못하는 싸움이라는 것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 싸움에서는 자신의 손해를 최소화해야 하고, 동시에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책을 찾아야 한다. 이번 합의는 한국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의 합의문으로서의 공동선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불만은 남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만큼 나쁘지만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모 정치인의 발언처럼 아주 잘한 합의라고는 전혀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한 판정은 오만에 가깝다.
한국의 선택은 결국 상호조건적인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결빙이었다. 그냥 문제 자체를 통으로 얼려버렸다. 여전히 얼음 조각 안의 암세포는 살아 있다. 정치적 합의라는 얼음으로 이는 봉인되어 있지만, 이 얼음은 영구적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이 문제는 다음 글로 넘기고자 한다
PS. 까려면 쉐도우 복싱하지 말고 댓글로 까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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