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틴 학살은 오늘 날에도 폴란드-러시아 관계의 영향을 미치는 사건 중 하나이다.
이 물음은 사실 양국관계의 역사문제에서 중요한 지점이 무엇인가를 되짚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역사문제는 어떠한 방식으로 종결되어야 하는가? 화해(reconciliation)인가 아니라면 반성(contrition)인가, 그렇지 않다면 합의(consent)되어야 하는가? 엄밀히 말해 한국인의 다수는 일본의 ‘반성’을 바래왔다. 이는 사과(apology)와는 다른 개념으로 상대국의 전적인 사과와 이에 대한 전적인 책임에 입각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1그러나 이러한 일방적인 반성은 수많은 국가관계에서의 역사문제에서 이뤄진 적이 거의 없다. 독일의 사례를 많이 언급하곤 하는데, 독일의 사례 역시 전적인 사과+전적인 책임에 입각한 행동으로 지속된 사례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례이며 독일-폴란드/독일-프랑스/독일-네덜란드와 같은 사례는 엄밀히 말하면 ‘화해’에 가까운 사례이다.
빌리 브란트의 이 제스쳐는 독일과 폴란드의 역사문제의 화해의 결정적인 공헌을 세웠다.
화해는 양국간의 관계 개선을 전제로 역사문제에서 필요한 문제를 논의하고 양국간의 필요한 행위를 이행하며, 가해국은 필요한 사과를 피해국은 용서와 상호 관계개선을 지향하는 행위를 말한다. 반성에서는 피해국의 용서와 관계개선이 필요하진 않지만, 화해에서는 용서와 관계개선이 지향된다. 따라서 상호간의 선의와 호의를 필요로 하며 이 과정에서의 사과(apology)의 수위는 반성보다는 결과적으로는 같거나 낮은 수준이 된다. 2김대중 정부 이후 한국과 일본 정부 관계자와 학계 일부는 ‘화해’에 대한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왔고, 이러한 화해를 통해 양국간의 과거사 문제가 다른 영역의 협력을 촉구하기를 원해왔다. 이는 실제로 독일의 과거사 문제 해결을 참고한 바가 크다. 냉전이 치열해지자 독일은 냉전의 최전선 지역이 되었고, 따라서 독일은 자본주의 진영으로 복귀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프랑스와 네덜란드, 벨기에와 같은 국가와 화해를 진행해야 했고 이 화해의 과정은 9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냉전이 붕괴되자 해결되지 않은 역사문제를 가진 폴란드와의 화해를 시도했고 상호간의 역사적 내러티브를 내세우던 단계에서 서로의 내러티브를 교차하고 상호간에 납득 가능한 역사적 내러티브를 도출하는 단계를 만들어 내며 화해를 이끌어 냈다. 이 과정에서 상호간의 공동 역사교과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이는 동아시아의 국가들에게도 중요한 레퍼런스가 되어왔다.
합의는 위의 단계와는 다르다. 합의는 역사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지극히 제한적인 정치적인 종결수단이며, 이는 역사문제를 종식하는 것이 아닌 양국관계에서 언급되지 않게 하기 위한, 즉 결빙(freezing)을 위한 방식이다. 즉 합의는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서의 역사문제의 종결의 형태로서 나타나게 된다. 사실 합의는 엄밀히 말하면 다른 해결해야 할 문제에 역사문제가 직접적인 방해가 될 때 이를 덮고 넘어가기 위한 방식 중 하나로 궁극적으로 여기에서 사과는 한정적일 가능성이 크며, 역사문제의 해결로서는 상호국의 국민들이 모두 납득할 가능성이 적다.
그리고 또 다른 방식으로 ‘방치’가 있다. 역사문제를 다른 영역의 이슈들보다 우선순위를 뒤로 두며 이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망각의 영역에 맞기거나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과거사 문제에서 이러한 방식이 가장 주된 ‘해결방식’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영국은 1차대전 이전의 쿠르드족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화학무기 사용을, 터키는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어떠한 입장도 표한 바 없다.
우리는 늘 일본에게 ‘반성’을 요구해왔다. 엄밀히 말하면 좁은 의미의 ‘사과’가 아닌 ‘반성’을 요구해왔고 이러한 한국의 대응에 대해 일본은 ‘사과’를 해온 것도 사실이다. 다만 양 국 모두 역사문제의 종결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일본은 솔직한 의미로의 ‘방치’를 조금 더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정부는 ‘화해’를 언급해왔다. 이러한 상태로 역사문제는 지속되어 왔고 그 중에서 위안부에 대한 이슈가 다른 이슈들보다 더 중요하게 작동해온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다만 국제정치적 변화에 의해 역사문제는 종결을 지속적으로 요구 받게 되었다. 동북아의 국제정치구조는 유럽이나 다른 지역에 비하면 형태 자체는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다른 지역에 비하면 이 지역은 2차대전 이후로 ‘홉스적’인 지역이다. 허나, 힘의 역학은 지속적으로 변화해왔다. 이 지역 국가만큼 강한 국력의 변화. 엄밀히 말하면 경제력과 군사력이 상대적인 의미에서건, 절대적이건 크게 증진되어온 지역도 드물다. 따라서 이러한 국력의 변화는 국제정치적 능동성과 명확성을 요구 받게 되었으나 내내 역사문제는 국가관계에서 이 문제를 불투명하게 만들어왔다.
‘반성’의 요구-‘방치’의 지속이 교차하면서 결국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 국가는 문제 해결을 동맹국, 그리고 국제구조로부터 요구 받게 되었고 굉장히 제한적이고, 한계가 매우 명확하지만 ‘합의’를 선택하게 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합의’에 의한 종결 혹은 결빙이 지속력을 가지는 지에 대한 여부는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화해/반성/방치에 의한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합의’는 거의 유일하게 가능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역사를 ‘정치적 합의’로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은 사실상 역사에 대한 폭거는 분명 맞다. 그러나 역사가 더 이상 역사가 아니고 그것이 기억의 정치로서 작동한다면 그 지점부터는 정치에 입각한 방법이 통용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의 영역에서부터 가장 중요한 논리는 바로 마키아밸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한 개념인 정치적 현실주의라는 점에서 ‘합의’가 불가능한 선택이 될 수는 없다. 합의를 이루는 과정에서의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겠지만, 이미 역사문제가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에서의 역사문제가 된 이상 그것은 정치가 작동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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