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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읽기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읽기를 시작하며

Fulton 2010. 11. 2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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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를 왜 읽는가?

최근의 작업 중에 있어 개인적인 작업의 방향은 전반적으로 여전히 한국은 한국의 특수성이 강조되기 이전의 휴머니즘적, 혹은 서구 문명의 개념에서의 ‘보편성’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는 쪽의 논지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한국의 특수성을 배제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특수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매우 독특하고 보편성과 특수성을 취사 선택하는 논리로 진행되어 가는 것이 문제이다. 즉 특수성을 살리기 위해 보편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그것이 보편적 ‘인간’의 문제일지라도 말이다. 이는 한국에서 발현되는 독특한 전체주의의 형태라는 느낌도 강하다. 뭐 사실 이런 논지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비판한 1910년대의 일본에서의 히라타 국학의 계열이 주창한 ‘국체론’에서 파생된 천황국가도 결국 같은 논지지만.. 이런 측면에서 아시아 국가는 비슷한 면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난 전체주의의 보편적 분석에 대해 독해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전체주의 및 파시즘의 가장 권위있는 저서를 뒤지다 보니 『전체주의의 기원』이 잡혔다. 한나 아렌트에 대한 여러가지를 떠올려 보고 그의 다른 저술들을 생각해보면 이 저술의 가치는 정말 뜻 깊다. ‘나 자신의 문제는 정치적이었다. 순전히 정치적이었다.’라고 말하는 그의 말은 그의 정치에 관한 실천과 성찰이 얼마나 실존적인 문제였는지도 떠올리게 준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주의를 고찰하는 한나 아렌트의 저술은 분명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한나 아렌트의 책은 사실 사상책치고는 재미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정치사상, 즉 철학 저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읽는 재미는 없는 책이다. 그래서 나도 곰곰히 이 책을 어떻게 설명을 하고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또한 어떻게 읽어주냐에 대해서 고민을 했어야 했다. 결국은 원문을 인용하면서 읽어주고 주석을 다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해를 해주길 바란다. 아직은 기다려 달라. 뭔가 나도 흥미진진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 내 내공도 그리 되지는 못하고 적어도 한나 아렌트라는 이름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한나 아렌트가 살았던 시대를 떠올려야한다. 한나 아렌트가 겪었던 시기는 세계 2차대전이었다. 세계 1차대전이 세계의 형식적, 국제체제적인 시스템에 큰 변화를 주고 이른바 ‘국제정치’를 만들었다면 2차대전은 국내, 국제 모든 정치의 형태에 대해 변화를 강요하였다. 단순히 정치 뿐이겠냐만은 정치만으로 한정짓자면 확실히 2차대전 이전과 이후는 전후, 전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변화였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시대를 살았고 유대인으로서 시련과 시대의 변화를 느끼고 겪어야 했다.

한나 아렌트는 여기에서 전체주의라는 흐름에 주목한다. 과연 전체주의는 2차대전이 만들어낸 괴물인가 아님 원래부터 역사적으로 내재하던 그런 관념인가? 한나 아렌트는 일반적인 학자들과 달리 전체주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그 체제를 층위적으로 서술하진 않는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이해하려고 했으며 전체주의에 근저에는 폭력이 있음을 강력히 지적 하고 있다. 이는 유태인으로서 그가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느낀 경험이 분명히 작동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한나 아렌트는 폭력과 ‘자유의 폐지’가 결국 전체주의에서 나타나는 것을 지적하며 이러한 주제의식은 『전체주의의 기원』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과연 이는 한나 아렌트가 본 2차대전과 그 이전의 전체주의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 난 이점에서 아니라고 본다. 난 한국 역시 이러한 폭력과 자유의 폐지라는 측면이 한국 사회 전반에서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최후의 경고는 이러한 전체주의가 언제든지 다시 나타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난 이러한 점을 한국사회가 경계해야 함을 위해서라도 『전체주의의 기원』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난 일단 서론은 조금은 배제를 하고 읽으려 한다. 서론을 읽는 다는 것은 일종의 답을 알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 더 엄밀하고 정확한 독해를 위해서는 서론은 일단 두고 맨 마지막에 읽는 것으로 하고 가려 한다. 그것은 책의 각 챕터를 이루고 있는 반유대주의, 제국주의, 전체주의의 서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서론을 읽고 들어가 버리면 우리는 많은 문장을 놓고 가버릴 개연성이 높다. 이는 많은 주석서가 택하는 사실 식상한 방식이기도 하다. 난 그런 식상한 방식을 택할 생각이다.

나 역시도 이 책을 같이 읽어나가며 포스팅을 할 예정이다. 이미 여러번 보아 너덜너덜 해진 책이지만 다시 한번 이 책을 읽고 그 함의를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 포스팅과 필자는 함께할 생각이다. 사실 같이 읽어나간다는 생동감만큼은 독서에 있어 해석에 많은 용이함을 제공한다. 최소한 그것만큼은 내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 그리고 이 시작하는 글은 계속 변할 수도 있다. 글을 읽으며 느끼는 바가 변하면 결국 시작도 끝도 모두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글이다. 이 글은 시작하는 의미라기보다는 책을 읽기전 준비하는 마음과 같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변경이 온다면 언제든 이 글은 고쳐질 수가 있다. 그것은 반박과 토론에 의해서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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