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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낭은 본격적으로 네이션이라는 것에 대해 당시에 어떠한 오해를 하고 있으며, 그러한 오해에 대해 네이션이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정확히 네이션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제 설명해 나간다. 르낭 이전에 네이션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략 이러했다. 풍습-언어의 기반을 둔 언어 공동체, 혹은 혈연과 역사의 기반을 둔 종족 공동체, 또는 이 둘을 결합한 역사 공동체 등이 존재했고 이러한 담론은 전반적으로 독일 지역이 주도하고 있었다.
사실 르낭과 거의 같은 시기에 네이션을 논한 사람은 피히테였다. 피히테 역시 동질성, 통일성으로서의 네이션을 말하며 국국민국가로서의 네이션을 말했지만 르낭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그 기반에는 언어가 크게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르낭은 이에 대해 그것은 하나의 결과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르낭은 아무래도 스위스(헬베티아 연방)을 염두에 두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듯하다. 결국 르낭은 기존에 작동하던 네이션에 대한 관념을 역사적 사례로서 비판하며 자유주의적인 측면에서 네이션에 대한 엄밀한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그것은 다음에 등장할 기술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는 더 큰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종족을 네이션과 혼동하고 있으며, 종족 집단이나 오히려 언어 집단에다 실제로 존재하는 네이션과 비슷한 절대적 지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55여기에서 르낭은 기존의 논란에 대해 일단 종족과 네이션은 분명히 다르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서는 역사적이며 사실적인 측면에서 르낭은 기존의 종족과 네이션이 분명히 다르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이해되는 네이션이라는 개념은 역사에서 매우 새로운 무엇입니다. 고대는 네이션 국가라는 것을 겪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중국, 고대 바빌로니아는 결코 네이션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태양의 아들이나 천자가 이끄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중국 시민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집트 시민이라는 것도 없었습니다. 57르낭은 계속해서 네이션의 태동을 설명해 나간다. 네이션을 설명하는 데 있어 인류학적인 차원에서 나오는 원초주의나 혹은 역사학에서 제기하는 영속주의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네이션이라는 개념 자체가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새롭게 등장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즉 고대 국가는 네이션과 분명히 다르다는 지적이다. 이는 국가의 고대, 봉건에는 네이션이 결여되어 있음을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네이션의 존재기반을 제공했던 원칙을 세계에 도입했던 것은 바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었습니다. ...그들 인종의 핵심이 변한 것은 별로 없지만 그들은 옛 서로마 제국의 상당 부분에 정복자들의 이름을 딴 왕조들과 군사 귀족을 심어 놓았습니다. 58르낭이 네이션을 언급함에 있어 네이션의 태동은 로마 제국의 멸망과 맞닿아 있는 게르만 대이동에 있다는 지적을 한다. 그러나 이 말을 게르만 대이동이 네이션의 출발과 연결된다고 봐서는 안된다. 네이션을 구성하는 데 있어 하나의 필요조건으로 작동한 것이지 게르만 대이동이 네이션의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이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결국 이 다양한 국가들을 특정짓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국가들을 구성하고 있는 주민들 간의 융합입니다. ...본질적으로 두 가지 상황이 그러한 결과를 낳는데 기여했습니다. 우선은 게르만 사람들이 그리스, 라틴 민족과 지속적인 접촉을 하기 시작하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정복자와 패자가 동일한 종교일 때, 아니 오히려 정복자가 패자의 종교를 받아들일 때 종교에 따라 사람들을 절대적으로 구별하는 터키의 제도같은 것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두번째 상황은 정복자 쪽에서 자신들 고유의 언어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59르낭은 여기에서 중요한 함의를 하나 말하고 있다. 그것은 네이션이라는 것은 하나의 동질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 동질화가 일종의 강제와 위계적 동질화 과정이 아닌 균질적인 동질화라는 것이다. 즉 패자와 승자, 강자와 약자가 그 위계와 관계 없이 하나로 동질화 되는 과정이 바로 네이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함의에 대해서는 뒤에서도 계속 언급이 등장한다.
망각-심지어 역사적 오류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겠는데-은 네이션 창출의 근본적인 요소이며, 바로 그러한 연유로 역사 연구발전은 종종 네이네이션에 대해 위험한 것으로 작용합니다. 사실 역사 분석에 의한 탐구는 모든 정치조직의 기원에서 이뤄졌던 폭력적인 사태도, 심지어 가장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던 정치 조직의 기원에서조차 존재했던 폭력적인 사태들을 재조명해버립니다. 61사실 이 부분이 르낭의 서술에서 가장 의미가 있는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가 왜 역사를 왜곡하고, 그러한 왜곡을 그 국민들은 신뢰하고 그거에 따르는지에 대하여 이는 그를 설명하는 기술이다. 일본 역사 문제, 동북공정과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문제에 자유롭지 않은 한국에게 많은 함의를 제공한다. 역사 연구와 그로 인해 발견되는 ‘팩트’들이 네이션 자체에 존재에 위기감을 안겨 줄 수 있다는 있다는 기술은 분명 의미가 있으며 네이션의 명분이 역사로부터 도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공동체들은 각기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공통적인 것이라고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은 본질적으로 모든 개인들이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며 많은 일들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62역사 공동체로서의 네이션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결국 결과로서의 역사라는 것이다. 즉 같은 네이션이기 때문에 같은 역사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고 망각하는 것이지 원래 역사가 같기 때문에 같은 네이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역사공동체나 문화공동체로서의 네이션은 결국 결과론이지 그것이 같기 때문에 네이션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르낭의 설명이다. 결국 르낭은 여기에서 네이션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결국 르낭은 기존의 네이션에 대한 담론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현대 네이션은 한쪽 방향으로 모아지는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야기된 역사적 결과물입니다. 통일은 때로 프랑스의 경우처럼 한 왕조에 의해 실현되기도 하고, 네덜란드, 스위스, 벨기에의 경우처럼 주들의 직접적인 의지에 의해 실현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봉건제도의 변덕에 대해 뒤늦게 승리를 거둔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처럼 사회전체적인 분위기에 의해서 통일되기도 합니다. 언제나 심오한 존재 이유가 이들의 형성을 주재했습니다. 63또한 네이션이 한 가지 방향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만들어져 왔음을 설명한다. 여기에서 르낭은 유럽사적 기반으로서 네이션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네이션은 결국 민족이라는 관념보다 국가라는 관념에 보다 가깝다. 여기에서 르낭의 네이션관이 조금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네이션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63다시 르낭은 논의를 시작한다. 과연 네이션이란 무엇인가? 르낭은 이렇게 기존의 논의에서의 헛점을 드러내 놓고 자신의 논의를 진행해나간다.
사실 르낭과 거의 같은 시기에 네이션을 논한 사람은 피히테였다. 피히테 역시 동질성, 통일성으로서의 네이션을 말하며 국국민국가로서의 네이션을 말했지만 르낭과는 달리 근본적으로 그 기반에는 언어가 크게 작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르낭은 이에 대해 그것은 하나의 결과론이라고 말하고 있다. 르낭은 아무래도 스위스(헬베티아 연방)을 염두에 두고 그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듯하다. 결국 르낭은 기존에 작동하던 네이션에 대한 관념을 역사적 사례로서 비판하며 자유주의적인 측면에서 네이션에 대한 엄밀한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그것은 다음에 등장할 기술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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