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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낭은 전쟁의 책임에 대해서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서 이른바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국민성에 의한 서술을 통해 전쟁이 발생하던 과정을 주욱 서술하고 있다. 결국 그는 쌍방과실로 보불전쟁을 결론내고 있다.프로이센 융커들의 거만함은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들의 성공에 질투를 느끼게 했고 이러한 질투에 대항하여 프랑스는 ‘신문들은 경박했으며, 군대는 거만하고 완고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야당은 정부에게 전쟁준비를 제대로 하고 있느냐고 비난을 퍼부었으며 정부를 모욕하고 군주는 과도한 개인적 권력 추구를 통해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함.‘으로서 전쟁을 유발하였다고 르낭은 서술한다.
보불전쟁을 가져온 것은 결국 두 국가가 내포한 총체였다는 것이 르낭의 설명이다. 이는 운명론적인 귀결로도 보이지만 수많은 길 중에서 유력한 하나의 길을 택했다고 보는 편이 좀 더 정확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는 뒤의 서술에서 나타난다. 르낭은 그 단 하나의 바로잡는 힘에 대해서 말한다.
이 서술과 함께 르낭은 영국의 유럽이라는 국제정치의 세력균형자로서의 모습에 대해 말한다. 즉 유럽이라는 국제정치의 공간을 살펴본다면 전쟁을 막는 힘은 바로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세력균형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베스트팔렌의 국제정치질서적인 관념이며, 현재의 국제정치의 조류중에서는 매우 고전적인 현실주의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수가 현실주의 국제정치질서에 대해 파괴적이고 힘을 압세운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현실주의가 추종하는 것은 ‘균형’이라는 이름의 평화다. 르낭은 곧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다시 한번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이는 유럽연합과는 정말 상반된 관념이다.
사실 이 구절이 르낭을 프랑스내 국수주의자들의 추앙을 받게 한 구절이다. 알자스와 로렌은 보불전쟁에서 제일의 초점의 문제였고 수많은 프랑스의 국수주의자는 알자스와 로렌의 할양에 대해 극심한 반대를 표하였다. 이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하지만 르낭을 프랑스의 국수주의로 바로 연결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해이다. 르낭은 앞의 챕터에서 룩셈부르크 사례를 살펴보면 단순히 프랑스 위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룩셈부르크의 동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알자스-로렌 지역은 분명 프랑스라는 의식이 강하였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긴 했지만 프랑스라는 의식은 분명히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르낭은 알자스-로렌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가 국수주의자가 아님은 바로 다음의 서술에서 드러난다.
위 문장을 바라본다면 결국 르낭은 독일과 프랑스의 양립으로서 이 저술을 이끌고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낸 국제정치질서에 의해 독일과 프랑스라눈 두 Nation은 서로가 원하는 안정을 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럽은 전 유럽적인 하나의 커뮤니티 적인 관념이 아닌 국가간의 역학 질서가 만들어내는 공간에 의미에 더 가깝다. 이는 아래의 서술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1814년 이후로 존재한 유럽의 국제정치 질서는 이른바 메테르니히 체제, 혹은 빈 체제로 말할 수 있다. 이는 신성동맹으로 나타나는 유럽의 세력균형 질서로 설명이 가능하다. 르낭은 이러한 국제정치질서는 비록 보불전쟁을 막지는 못하였지만, 이러한 국제정치질서가 자리를 잡아 평화안정을 가져오길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서 이러한 국제정치질서의 행위자인 국가들이 Nation으로 재편되고 자리잡아야 하며 그것이 또한 정당하다는 것이 르낭의 설명이다. 르낭은 Nation의 당위를 두가지로 합리화 하는데 첫째는 프랑스 국내의 선제적인 Nation화, 둘째는 이러한 Nation이 만들어내는 유럽의 국제정치질서가 평화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방주의와 기능주의, 신기능주의, 제도주의를 포함하는 통합이론과의 차이를 설명해야 한다. 르낭은 여기애서 연방주의적인 유럽 공동체를 역설하고 있다. 연방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구성체들이 주권을 가지고, 동등한 입장에서 연방안에서 의사를 결정하고 평화안정을 이뤄나가는 것이 연방주의이다. 이러한 연방주의는 르낭의 시대에 있어 평화안정을 만들어나가는 하나의 방법론이었다. 단 여기에서 서로 다른 구성체에 대해 침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재의 EU와 차이를 가진다. 연방주의와는 달리 통합이론은 근본적으로 서로 내부의 구성체간의 관여가 허용된다. 이러한 점에서 르낭의 입장을 현재의 유럽공동체의 원형으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여기에서 르낭은 국가는 전쟁을 절대 원하지 않지만 정치제도에서 파생되는 현상이 곧 전쟁을 유도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하면서 결국 전쟁의 발생은 국가에게 있어 필연적인 것이아니라 국가가 보이는 정치제도가 그것을 유도한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곧 독일과 프랑스는 두 Nation이 성립하더라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르낭의 지론인 것이다.
이 서술은 르낭이 언급하는 타자가 있음으로서 Nation이 형성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본다. 즉 슬라브주의도, 게르만주의도 결국 타자가 존재함으로 가능한 것이며 이는 엄밀히 말하면 독일이라는 Nation이 형성된다면 바로 이어서 동유럽 역시 점차 Nation들이 등장해 나갈 것임을 함의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르낭은 ‘가장 비전형적인 프로이센적 독일인으로서의 괴테’를 언급하며 프로이센이 독일이라는 Nation으로 나타나게되면 기존에 가지고 이떤 프로이센은 점차 용해되 버릴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이는 아래의 서술에서 강하게 부연되고 있다.
이러한 예측은 엄밀히 말하면 프로이센이 상실되지 않은 독일이 1차대전을 일으키면서 낭패를 겪게 했고 그 이후에 등장한 바이마르는 정말 르낭이 꿈꾼 그대로의 독일이었지만 바로 그다음에 등장한 나치는 르낭의 생각과는 거리가 너무 먼 ‘독일’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 등장한 독일은 르낭이 생각한 독일의 이미지와 정말 가깝지만 나치에 등장에 대해서 르낭의 방법론적으로 추적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등장한 빌헬름이 만든 프로이센이 강한 독일이 일으킨 1차대전이 패망하면서 독일은 부담을 안게 되었고 이러한 부담이 결국 나치로 이어졌다는 설명을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르낭도 결국 나치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면을 여기서 노출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의 서술은 놀랍기 그지 없다.
인민들의 투쟁이 인종말살의 투쟁이 된다는 기술과 독립적인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 평화에는 부적할수도 있다는 설명은 홀로코스트와 그 이후로 수많이 벌어지고 있는 제노사이드를 비춰보면 사실 놀라운 예측이라 할 수 있다. 르낭은 보불전쟁의 원인과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의 평화가 지속되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이 많은 함의를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르낭은 연방주의자인 동시에 국제정치적으로는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결국 르낭이 꿈꾸는 건 모두 동등한 Nation, 그리고 그 동등한 Nation이 균형을 이루며 연방을 형성하고 이 연방의 질서가 곧 유럽의 평화와 전쟁의 종말을 가져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제1장의 전쟁의 책임을 묻는 챕터 전반에는 르낭은 두 가지를 설명한다. 첫째, Nation의 형성은 어느 국가라도 정당하다. 둘째, 유럽의 평화는 Nation의 형성에 의한 연방에 의해 가능하다. 이 두 설명이 곧 르낭의 유럽평화론인 것이다. 현실주의적인 가정을 포기하지않으면서 Nation이라는 국제정치에서의 행위자를 통한 연방주의를 거치면서 르낭은 유럽평화가 가능하며 그것이 당위성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사실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당시의 학자들이나, 혹은 프랑스가 유럽의 제 1국이어야 하며 독일을 분열시켜야 한다는 리슐리외를 계승하는 국수주의자, 그리고 유럽 평화는 패권국이 등장하거나 종교적 질서를 통해 안정을 시켜야 한다는 수구주의자들을 논파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챕터에서는 르낭은 그럼 Nation은 어떻게 Nation인가를 설명하려 한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의 본질은 다음 챕터에서 본격화된다.
르낭에 대한 오해는 참으로 많다. 하지만 이 1장의 서술들에서 우리는 국수주의자, 국가주의자로서의 르낭의 이미지가 어떻게 허위였는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2장에서는 르낭이 말하는 Nation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른지에 대해서 검토해보고 오늘 날의 르낭이 가지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보다 깊게 다뤄보고자 한다.
전쟁의 가장 끔직한 결과는 바로 전쟁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무능력하게 만들고 상식이 비겁함이나 반역으로 규정되는 치명적인 악순환의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솔직하게 말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건적인 거만함, 극단적인 애국주의, 과도한 개인적 권력, 대륙에서 의회정부가 그다지 발전되지 않은 것 등이 문명이 끼친 해악을 오직 단 하나의 힘만이 바로잡을 수 있을것이라고 말이다.[p40]
보불전쟁을 가져온 것은 결국 두 국가가 내포한 총체였다는 것이 르낭의 설명이다. 이는 운명론적인 귀결로도 보이지만 수많은 길 중에서 유력한 하나의 길을 택했다고 보는 편이 좀 더 정확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는 뒤의 서술에서 나타난다. 르낭은 그 단 하나의 바로잡는 힘에 대해서 말한다.
이 힘. 그것은 바로 유럽이다. 유럽으로서는 이 두 Nation가운데 그 어느 쪽도 지나치게 승리하거나 패배하지 않는 것이 그야말로 바람직하다. ...프랑스는 영국이 번영할 수 있게 한 제반조건들 가운데 하나이다.... 종족들 간의 투쟁에서 영국은 우리와 함께 있다. 프랑스와 영국의 동맹은 수세기에 걸쳐 이뤄졌다. 영국이 아메리카, 콘스탄티노플, 인도에 관해서 계획을 품고 있다면, 영국에게는 프랑스가 그것도 강력한 프랑스가 필요할 것이다.[p40]
이 서술과 함께 르낭은 영국의 유럽이라는 국제정치의 세력균형자로서의 모습에 대해 말한다. 즉 유럽이라는 국제정치의 공간을 살펴본다면 전쟁을 막는 힘은 바로 그 공간에서 벌어지는 세력균형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베스트팔렌의 국제정치질서적인 관념이며, 현재의 국제정치의 조류중에서는 매우 고전적인 현실주의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수가 현실주의 국제정치질서에 대해 파괴적이고 힘을 압세운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현실주의가 추종하는 것은 ‘균형’이라는 이름의 평화다. 르낭은 곧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다시 한번 노파심에서 말하지만 이는 유럽연합과는 정말 상반된 관념이다.
약하고 굴욕적인 프랑스란 존재할 수 없다. 알자스와 로렌을 잃어버린다면 프랑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매한가지이다. 프랑스라는 건축물의 체계는 너무도 촘촘하기 때문에 거대한 돌 한두 개만 빼버려도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프랑스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프랑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 이 모순된 두 가지를 양립시키기를 꿈꾸지 말지어다.[p41]
사실 이 구절이 르낭을 프랑스내 국수주의자들의 추앙을 받게 한 구절이다. 알자스와 로렌은 보불전쟁에서 제일의 초점의 문제였고 수많은 프랑스의 국수주의자는 알자스와 로렌의 할양에 대해 극심한 반대를 표하였다. 이는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하지만 르낭을 프랑스의 국수주의로 바로 연결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해이다. 르낭은 앞의 챕터에서 룩셈부르크 사례를 살펴보면 단순히 프랑스 위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룩셈부르크의 동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알자스-로렌 지역은 분명 프랑스라는 의식이 강하였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이긴 했지만 프랑스라는 의식은 분명히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르낭은 알자스-로렌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가 국수주의자가 아님은 바로 다음의 서술에서 드러난다.
...프랑스가 없는 세계는 독일이 없는 세계와 마찬가지로 훼손된 세계일 것이다. 인류의 이 거대한 주요 기관들에게는 각자 고유한 역할이 있다. 각자의 다양한 사명을 완수하도록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p42]
위 문장을 바라본다면 결국 르낭은 독일과 프랑스의 양립으로서 이 저술을 이끌고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의 개입은 독일에게는 자신들의 국내 운동에 전적인 자유를 보장하고, 프랑스에게는 1815년의 고정된 경계선을 유지하면서 다른 꿈을 꾸지 못하도록 막는다. 유럽의 개입은 패배 후에도 파손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도록 하고 자신의 과오를 생각해보고 자유롭게 거기에서 벗어나도록 한다.[p42]
유럽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낸 국제정치질서에 의해 독일과 프랑스라눈 두 Nation은 서로가 원하는 안정을 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럽은 전 유럽적인 하나의 커뮤니티 적인 관념이 아닌 국가간의 역학 질서가 만들어내는 공간에 의미에 더 가깝다. 이는 아래의 서술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다양한 유럽 국가들이 서로 너무 독립적이었고 아무도 다른 나라를 제압할 만큼 우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권재민을 능가하는 회의도, 국회도, 암픽티온 법정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관은 잠정적인 상태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유럽은 특히 1814년 이래로 한 동맹이 주는 위협을 제지하는 결의를 지지하면서 종종 집단의 이름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끔직한 전쟁을 막을 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p43]
1814년 이후로 존재한 유럽의 국제정치 질서는 이른바 메테르니히 체제, 혹은 빈 체제로 말할 수 있다. 이는 신성동맹으로 나타나는 유럽의 세력균형 질서로 설명이 가능하다. 르낭은 이러한 국제정치질서는 비록 보불전쟁을 막지는 못하였지만, 이러한 국제정치질서가 자리를 잡아 평화안정을 가져오길 바라고 있다. 이를 위해서 이러한 국제정치질서의 행위자인 국가들이 Nation으로 재편되고 자리잡아야 하며 그것이 또한 정당하다는 것이 르낭의 설명이다. 르낭은 Nation의 당위를 두가지로 합리화 하는데 첫째는 프랑스 국내의 선제적인 Nation화, 둘째는 이러한 Nation이 만들어내는 유럽의 국제정치질서가 평화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므로 가장 강력한 국가에 대항하여 유럽 공동체의 안녕에 유용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결정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다양한 국가들의 개입, 중재, 동맹 안에 있다. 이 힘이 점점 더 구체적이고 정기적이 되면서 차후에는 비록 영구적이지는 못하더라도, 주기적으로 열리는 진정한 회의의 형태를 가져오기를 기대해보자. 또한 이 힘이 연방협정에 의해 그들 사이에 연계된 유럽 합중국의 핵심이 되기를 기대해보자. [pp43~44]
이 구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방주의와 기능주의, 신기능주의, 제도주의를 포함하는 통합이론과의 차이를 설명해야 한다. 르낭은 여기애서 연방주의적인 유럽 공동체를 역설하고 있다. 연방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의 구성체들이 주권을 가지고, 동등한 입장에서 연방안에서 의사를 결정하고 평화안정을 이뤄나가는 것이 연방주의이다. 이러한 연방주의는 르낭의 시대에 있어 평화안정을 만들어나가는 하나의 방법론이었다. 단 여기에서 서로 다른 구성체에 대해 침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재의 EU와 차이를 가진다. 연방주의와는 달리 통합이론은 근본적으로 서로 내부의 구성체간의 관여가 허용된다. 이러한 점에서 르낭의 입장을 현재의 유럽공동체의 원형으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그 화근은 통탄할 만한 정치제도였다. 이 정치제도는 편협한 군대의 호언장담이나 변덕스러운 외교관들의 원한, 그리고 그들의 상처받은 자만심에 한 민족의 존재여부를 좌우하게 했다. [p44]
국가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부의 형태로든 공공의 자유의 형태로든 내적 발전을 원하고 있다. [pp44~45]
여기에서 르낭은 국가는 전쟁을 절대 원하지 않지만 정치제도에서 파생되는 현상이 곧 전쟁을 유도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하면서 결국 전쟁의 발생은 국가에게 있어 필연적인 것이아니라 국가가 보이는 정치제도가 그것을 유도한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곧 독일과 프랑스는 두 Nation이 성립하더라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르낭의 지론인 것이다.
슬라브인들은 게르만 집단이 분화되는 만큼 더욱 더 게르만 집단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한다. 슬라브인의 의식은 게르만인의 의식에 비례하여 증대하는데, 전자는 후자와 완전히 대조를 이루어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창출한다. [p47]
이 서술은 르낭이 언급하는 타자가 있음으로서 Nation이 형성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된다 본다. 즉 슬라브주의도, 게르만주의도 결국 타자가 존재함으로 가능한 것이며 이는 엄밀히 말하면 독일이라는 Nation이 형성된다면 바로 이어서 동유럽 역시 점차 Nation들이 등장해 나갈 것임을 함의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르낭은 ‘가장 비전형적인 프로이센적 독일인으로서의 괴테’를 언급하며 프로이센이 독일이라는 Nation으로 나타나게되면 기존에 가지고 이떤 프로이센은 점차 용해되 버릴 것이라는 설명을 한다.이는 아래의 서술에서 강하게 부연되고 있다.
프로이센의 수중에 독일의 힘을 결집하는 것은 일시적인 필요성에 의해 수반된 사태에 불과하다. 위험이 사라지면 통일도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독일은 머지않아 자연스러우 본능을 되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프로이센은 승리한 다음 날 적대적인 유럽과 마주칠 것이며, 개별적인 자치취향을 추구하는 독일과 만나게 될것이다. ..프로이센은 사라질 것이고, 독일은 남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갖게된 독일은 자유롭고 평화적이며 합법적인 의미에서 민주주의적이기까지 한 Nation이 될 것이다. 독일의 사회과학들 덕분에 놀라운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p48]
이러한 예측은 엄밀히 말하면 프로이센이 상실되지 않은 독일이 1차대전을 일으키면서 낭패를 겪게 했고 그 이후에 등장한 바이마르는 정말 르낭이 꿈꾼 그대로의 독일이었지만 바로 그다음에 등장한 나치는 르낭의 생각과는 거리가 너무 먼 ‘독일’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 등장한 독일은 르낭이 생각한 독일의 이미지와 정말 가깝지만 나치에 등장에 대해서 르낭의 방법론적으로 추적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비스마르크를 실각시키고 등장한 빌헬름이 만든 프로이센이 강한 독일이 일으킨 1차대전이 패망하면서 독일은 부담을 안게 되었고 이러한 부담이 결국 나치로 이어졌다는 설명을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르낭도 결국 나치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면을 여기서 노출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의 서술은 놀랍기 그지 없다.
독립적인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전쟁의 참화에서 인류를 벗어나게 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나는 반대로 항상 합법성이라는 온화하고 가부장적인 상징으로 대체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 인민들의 투쟁을 인종말살 투쟁이 되도록하지는 않을까. 또한 과거의 소규모 왕조전쟁이나 정치적 전쟁들을 인정했던 그러한 중용이나 예절을 인권조항에서 없애버리지 않을까 우려했다. [p51]
인민들의 투쟁이 인종말살의 투쟁이 된다는 기술과 독립적인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이 평화에는 부적할수도 있다는 설명은 홀로코스트와 그 이후로 수많이 벌어지고 있는 제노사이드를 비춰보면 사실 놀라운 예측이라 할 수 있다. 르낭은 보불전쟁의 원인과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의 평화가 지속되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이 많은 함의를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다.
민족자결주의라는 원칙에 유럽 연방의 원칙, 즉 모든 민족들에 우선하는 집단의 원칙을 결합시킬 때에야 비로소 전쟁의 종말을 보게 될 것이다. [p51]
여기서 르낭은 연방주의자인 동시에 국제정치적으로는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결국 르낭이 꿈꾸는 건 모두 동등한 Nation, 그리고 그 동등한 Nation이 균형을 이루며 연방을 형성하고 이 연방의 질서가 곧 유럽의 평화와 전쟁의 종말을 가져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제1장의 전쟁의 책임을 묻는 챕터 전반에는 르낭은 두 가지를 설명한다. 첫째, Nation의 형성은 어느 국가라도 정당하다. 둘째, 유럽의 평화는 Nation의 형성에 의한 연방에 의해 가능하다. 이 두 설명이 곧 르낭의 유럽평화론인 것이다. 현실주의적인 가정을 포기하지않으면서 Nation이라는 국제정치에서의 행위자를 통한 연방주의를 거치면서 르낭은 유럽평화가 가능하며 그것이 당위성이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사실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당시의 학자들이나, 혹은 프랑스가 유럽의 제 1국이어야 하며 독일을 분열시켜야 한다는 리슐리외를 계승하는 국수주의자, 그리고 유럽 평화는 패권국이 등장하거나 종교적 질서를 통해 안정을 시켜야 한다는 수구주의자들을 논파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챕터에서는 르낭은 그럼 Nation은 어떻게 Nation인가를 설명하려 한다. 민족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의 본질은 다음 챕터에서 본격화된다.
르낭에 대한 오해는 참으로 많다. 하지만 이 1장의 서술들에서 우리는 국수주의자, 국가주의자로서의 르낭의 이미지가 어떻게 허위였는가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2장에서는 르낭이 말하는 Nation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민족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른지에 대해서 검토해보고 오늘 날의 르낭이 가지는 함의가 무엇인지를 보다 깊게 다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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