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학자들이 기억의 정치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묻는 질문 중 하나는 기억이 정체성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느냐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사실 날카로운 함의를 담고 있는 데, 굳이 기억이라는 것을 왜 정치학에서 끄집어와 연구해야 하는가라는 당위와 연결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굳이 정체성으로 봐도 되는 것을 다른 학문분야의 산물을 연계해가며 봐야하는 지, 옥상옥을 만드는 것이 아닌지 하는 의문이니 말이다.
구성주의가 사실 모든 관념 영역을 다 먹으려 하는데 사실 그게 전부는 아니죠... 웬트 교수님..
사실 사회학을 하시는 분들은 이 질문을 들으면 황당하게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기억이라는 말의 의미가 당연히 정체성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많이 알고 있으니 말이다. 기억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집단기억을 의미한다. 집단기억은 단순히 개인의 기억들이 집합적으로 모여서 형성된 개념을 의미하진 않는다. 집단 기억의 다른 번역어인 집합적 기억이 집단기억의 성격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번역어인 연유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집단기억이라는 것은 피에르 노라의 말처럼 역사적 사실도 역사와도 다르다. 집단기억은 과거에 있었던 일에 관한 신념체계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이러한 점에서 객관성을 가지는 역사적 해석과도 다른 개념이다. 그러한 해석을 다툴 수 있는 하나의 내러티브가 되는 것이 기억일 수 있겠지만 역사적 해석이라는 거에는 분명 사실 그 자체를 벗어날 수 없지만 기억은 사실을 넘어설 수도 있으며 심지어 무관할 수도 있다.
집단기억 문제를 본격적으로 꺼내신 알브박스
집단기억은 집단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은 그 기억을 바탕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의 집단 정체성 안에 다양한 집단 기억이 교차할 수 있으며, 하나의 집단 정체성은 하나의 집단기억만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또한 정체성이 기억으로만 구성되지는 않는다. 정체성의 형성에 대해 많은 이론들은 인식의 공유를 전제로 하지만 집단이 속해 있는 구조와 환경 모두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즉 기억은 집단 정체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조건일 뿐이지, 집단기억이 무조건 하나의 집단정체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체성을 기억과 동일시하면 안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특히 이는 집단이 커지면 커질수록 단일한 집단기억과는 멀어지게 된다. 집단이 큰 차원일수록 다양한 기억이 공존하고 다툴 가능성이 커지며, 즉 하나의 기억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 여러 기억이 존재하고 경쟁하면서 큰 집단의 정체성을 만들 개연이 큰 것이다. 이는 국가 정체성, 민족 정체성과 같이 큰 단위의 집단 정체성에서 바로 드러난다. 일본이란 국가의 집단 정체성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피상적인 하나의 기억이 아닌, 야스쿠니와 히로시마의 기억이 모두 작동하는 것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을 인용하면, 근대 국가는 필연적으로 단일한 네이션의 정체성을 필요로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의 교육과 사회 동원 등의 행동으로 하나의 정체성을 형성하려 하는데, 여기에서 기억이 작동한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작동은 하나의 집단 기억이 아닌 여러 가지의 집단 기억의 교차가 이뤄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즉 정체성은 기억과 동일한 차원이 아니며 기억 마을을 지나 그 다음의 언덕 너머에 있는 마을의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에 대한 연구가 더 이뤄져야 하는 이유는 정체성과는 별도로 어떠한 집단 기억이 형성되며 이러한 집단 기억이 어떻게 정체성으로 이어지는 지를 보기 위해 연구가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정체성으로 축약하여 설명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정체성이라고 불리는 막연한 개념 근저에 무엇이 있는 지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점에서 기억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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