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내가 변하긴 변한 것 같다. 영국여행에서 내 머리 속, 뇌세포 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은 시대를 가리지 않은 미술의 ‘걸작’들과 더불어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있었던 압도적인 숫자의 공예품들이었다. 그 ‘걸작’들과 공예품들의 늪에서 난 기어 돌아왔지만 무엇인가 크게 변해버린 모습이다. 누가 그랬던가? 수영을 가르치려면 우선은 자기 키보다 더 큰 압도적인 물에 빠트릴 필요가 있다고. 그 안에서 헤어 나오는 과정 자체가 수영을 배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자 가장 폭력적인 방법이라고. 나는 어쩌면 미술 작품들과 공예품들에 대한 안목을 높이는 가장 폭력적이고 확실한 과정을 일 주일을 보내야 했다.
그런 과정이 나에게 무슨 변화를 줄까 했는데 일 년이 지난 오늘 크게 느꼈다. 중앙박물관에서 기획전시가 이뤄지고 있는 『미국미술 300년』 전시를 보면서 느낀 것은 나의 허영 자체가 너무 크게 늘었다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이 정도면 감동을 받았을 전시에 대해서 덤덤하게 이건 괜찮네 이건 좋네, 그런 느낌을 받고 만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예술작품이 넘쳐 나는 뉴욕이나 런던, 파리가 아니라 한국임을 알기에 어느 정도 수준에 만족하고 감동을 받아야 내 삶의 질에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다만 위안이 하나 된다면, 미술을 감상하는 방법 중에서 크로키를 할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전에 미술관에서 크로키를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크로키를 하게 되면서 극도의 추상이나 상징이 담긴 작품들은 크로키를 하면서 이전에 했던 감상보다 더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술에 대한 눈만 높아져서 내 삶의 질이 떨어진 것에 대한 댓가라면 그 댓가치고 너무 작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무엇이든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해왔지만, 이런 식으로 나의 영국 여행이 이렇게 다가올 지는 몰랐다.
전반적으로 전시는 괜찮은 편이다. 미국 미술의 시대적인 흐름을 잡고 이해하기에는 괜찮은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고 이름난 미국의 현대 미술 작가도 감초처럼 들어와 있다. 너무 엄청난 기대를 하지 않고만 온다면 무난하게 감상할 수 있다.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고 이름 값보다는 생각보다 알찬 전시라고 생각한다.
전시 자체는 최근의 한국에서 하고 있는 미술 전시 중에서도 괜찮은 편이다. 한 5년 전을 생각해본다면 한국에서 이뤄지고 있는 미술 전시의 질이 높아진 것을 사실 많이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나의 시각이 그런 것에 만족을 못해버린다면 그것도 문제다. 난 어디 즈음에 위치해야 할까? 결국 외국여행을 다니면서 죽어라 갤러리를 돌아다니면서 예술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현재는 유일하게 가능한 대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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