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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이야기

90년대 초반의 한국의 아이돌은 왜 아티스트화되었는가?

Fulton 2018. 7. 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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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 이어서 하는 일종의 설명이다. 지난 글의 목적은 한국과 일본의 아이돌의 관념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글이었다. 다만 이 지점에서 왜 한국은 그러한 경로를 선택했는가에 대해서 물음이 남았다. 이를 어느 정도 잘 설명해주는 책이 사실 있다. “90년대를 빛낸 명반 50”은 이러한 배경을 어느 정도 잘 보여주고 있고 당대의 상황과 이른바 역사적 정리를 어느 정도 잘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의 목적은 엄밀히 말하면 90년대의 명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하는 책이기에 왜 90년대의 아이돌과 아티스트가 사실상 같이 가는 결정적인 시기가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90년대가 아이돌과 아티스트가 혼재된 굉장히 이상한 시기였음을 보여준다. 이 글을 보고, 더 알고 싶으시다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90년대의 아이돌이 왜 아티스트인 동시에 아이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의 입장에서는 세 가지의 가설이 있다. 첫째는 분업화의 미비이다. 80년대 후반의 한국의 대중음악 판을 지배하고 있는 회사는 라인과 동아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는 아티스트의 활동을 지원하는 회사의 형태에 가까웠고, 이 회사에 소속되어서 활동할 수 있던 가수들은 기본적으로 아티스트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각주:1] 이러한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엔터테이너들은 어떠했는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김완선이다. 김완선은 그녀의 이모가 말그대로 총 프로듀서인 동시에 매니저로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대중음악 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산업화되지 않은 것이 당시의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의 대중음악 시장이었다. 따라서 이런 시장에서는 생산의 분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즉 포디즘적인 분업이 아닌, 고도의 도제식의 수공업형태가 일반적이었고, 따라서 이런 시장에서는 아이돌도 대중음악 시장 안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아티스트여야 이른바 ‘생산활동’이 가능했다.


한국의 대중음악 판에서 김완선의 가치는 그 단독적인 가치를 넘어서 맥락적으로도 중요하다.


둘째의 문제는 당시의 음악활동이 공연과 TV로 분리되어 있는 상황에서, 방송사가 이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플랫폼이 이른바 ‘대안적 플랫폼’을 제시하지 못했다. 조금 더 쉽게 말하자면 젊은 엔터테이너에게는 사실상 획일적인 플랫폼, 즉 아이돌의 플랫폼만이 제시되었다. 이른바 방송에 나오는 아이돌과 공연을 하는 아티스트 사이에서 제 3의 길이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당시의 상황에서 비춰본다면 이문세도 그 ‘일밤’의 메인 엠씨로 활동했었고, 실제로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음악적으로 방황했던 아티스트가 이상은이었다. 당시에도 이를 “video killed radio star”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방송의 컨텐츠의 다양성이 극도로 획일적이었던 시절에서 도출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젊은 소비자들과 연결되는 매개가 방송이었던 만큼, 이들과 연결되어야 했던 이른바 신세대 엔터테이너들은 결국 아티스트이자 아이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이상은은 앞으로도 계속 재평가 받을 것이다.


세번째 문제는 앞의 두가지의 문제와 연결된다. 앞의 두가지의 문제는 어떻게 컨텐츠가 생산되고, 어떻게 컨텐츠가 유통되는 지에 대한 문제였다. 세번째 문제는 다만 이러한 컨텐츠가 어떻게 등장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당시의 뮤지션-엔터테이너의 데뷔 방식은 크게는 두가지였다. 첫째는 가요제를 통한 데뷔였다. 둘째는 이른바 매니지먼트 회사라 쓰고 브로커라 읽는 행위자들을 통한 데뷔였다. 첫째를 통한 데뷔는 기본적으로 아티스트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매니지먼트 회사를 통한 데뷔이기에 가요제를 통한 데뷔보다는 보다 아이돌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회사들이 오늘날의 대형기획사들과 달리 회사내의 분업화와 기능적 전문화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결국 컨텐츠의 생산을 아티스트적 모델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수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모델은 기본적으로 대부분 공유되었다. 흔히 사용하는 네트워크방법론으로 접근하자면 몇 개의 노드 안에 대부분에 행위자들을 모두 포함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하면 김완선부터 서태지, 신해철, H.O.T, 핑클까지가 정말 한정된 노드만으로 다 그려넣을 수 있었다.[각주:2]


대학가요제 출신의 아이돌로 시작하여 아티스트로 커리어를 끝낸 신해철은 이 시대의 전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한국의 90년대의 아이돌이 아티스트화된 가장 큰 이유는 산업적 특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산업 내에서 컨텐츠의 생산구조와 컨텐츠가 연결되는 매개구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컨텐츠가 어떻게 등장하는 지에 대한 맥락 모두 결국 한국은 아이돌을 아티스트화를 진행하게 하였고, 결국 대중들도 이에 아이돌에 대해 평판하는 기준으로의 아티스트성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유산은 예전보다는 사실 많이 약해졌지만 오늘 날에도 지속되고 있고,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은 ‘경쟁’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아티스트적 면모를 오늘 날에도 계속 재생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프로듀스 시즌 2에서도 결국 살아남는 것은 보컬 멤버라는 말이 많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과거의 유산은 계속 재생산되고 있다. 이 지점이 오늘날 한국의 아이돌 시장이 가지는 독특한 지점이라면 독특한 지점일 수 있다.

  1. 라인과 동아의 형태에 가까운 회사를 오늘 날의 회사로 설명한다면 그것은 뮤직팜과 안테나 같은 회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2. 이에 대한 설명은 이 링크의 글을 참고하는 편이 좋다. 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32868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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