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litics

당신의 '기본값'은 모두의 '기본값'이 아니다

by Hwajun Lee 2026. 5. 8.

 

강의를 하면서 자주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같은 자료를 두고, 같은 사례를 두고 토론을 시키면, 학생들의 결론이 갈리는 지점은 대체로 분석의 정교함이 아니라 출발선이다. 무엇을 '정상'으로 두고 무엇을 '일탈'로 볼 것인가. 무엇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두고, 무엇을 설명해야 할 현상으로 둘 것인가. 이 출발선의 차이가 이후의 모든 분석을 갈라놓는다.

 

사회과학에서는 이걸 영가설이니 기준범주니 하는 용어로 부르지만, 일상의 언어로 옮기면 그냥 '기본값'에 가깝다. 어떤 상태를 디폴트로 두고 그것에서 벗어난 것을 설명하려 드는가. 문제는 많은 이들이 자신이 설정한 기본값을 '모두의 기본값'으로 착각하거나, 더 심한 경우 그것을 '인간 사회의 자연상태'로 착각한다는 데 있다.

정치체제의 기본값은 무엇인가

가장 흔한 착각 중 하나는 민주주의를 인류 정치체제의 기본값으로 두는 사고이다. 이 사고에서 권위주의는 '아직 민주화되지 않은' 상태이거나 '민주주의에서 후퇴한' 상태로 분류된다. 설명이 필요한 것은 언제나 권위주의 쪽이다. 왜 저 나라는 민주화되지 않았는가, 왜 저 정권은 권위주의로 회귀했는가.

 

그런데 인류사 전체를 펼쳐놓고 보면 압도적 다수의 시기, 압도적 다수의 정치체가 비민주적이었다. 보통선거권을 가진 자유민주주의가 다수의 국가에서 실현된 것은 길게 잡아도 10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민주주의가 디폴트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설명해야 할 것은 어쩌면 '왜 권위주의가 무너지지 않는가'가 아니라 '왜 어떤 시기, 어떤 사회에서는 민주주의가 작동하는가'일지도 모른다.

 

기본값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같은 사건을 보는 시선이 완전히 달라진다. 민주주의를 기본값으로 두면 권위주의 정권의 등장은 충격이고 일탈이고 비극이다. 비민주적 통치를 기본값으로 두면 민주주의가 일정 기간 유지되는 것 자체가 설명을 요하는 사건이 된다. 둘 중 어느 쪽이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이 어느 쪽 기본값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인지하지 못한 채 분석을 시작하는 것이 문제라는 이야기이다.

경제시스템의 기본값은 무엇인가

비슷한 혼동이 경제 영역에서도 반복된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인간 경제활동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두는 사고가 그것이다. 이 사고에서 국가의 개입, 규제, 재분배는 모두 '자연스러운 시장'에 대한 인위적 간섭으로 분류된다. 설명이 필요한 것은 시장이 아니라 시장에 대한 개입이다.

 

하지만 인류학자들과 경제사학자들이 오랫동안 지적해온 바에 따르면, 우리가 떠올리는 형태의 시장경제는 인간 사회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라기보다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 위에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화폐, 사유재산, 계약, 노동시장 어느 것도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다. 폴라니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시장이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영역이 된 것 자체가 근대의 특수한 사건이다.

 

반대로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나 공동체적 분배를 기본값으로 두는 사람들은 시장을 '왜곡'으로 본다. 인간이 본래 협력적이고 호혜적인 존재라면 경쟁과 축적은 어딘가 외부에서 강제된 것이라야 한다. 이 역시 자신의 기본값을 자연으로 착각하는 사례이다.

자연상태라는 가장 오래된 기본값 싸움

사실 이 문제는 대단히 오래된 것이다. 근대 정치사상의 시작점이 바로 이 '기본값 싸움'이었다. 흔히 사회계약론자로 한데 묶이는 홉스, 로크, 루소가 도출한 결론이 그렇게 다른 이유는 그들이 다른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홉스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속에 있다. 이 기본값에서 출발하면 분할되지 않은 절대적 주권자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 된다. 무질서가 디폴트인 세계에서는 강력한 질서의 대가가 아무리 비싸도 지불할 만하다. 로크의 자연상태는 다르다. 그곳의 인간은 이미 이성과 자연법 아래에서 자신의 생명, 자유, 재산을 누리고 있다. 정부가 필요한 이유는 무질서 때문이 아니라 이 기존의 권리를 더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해서이다. 이 기본값에서 출발하면 정부는 제한되어야 하고, 권리를 침해할 때는 저항받아야 마땅하다. 루소는 또 달라서, 자연상태의 인간은 본래 자유롭고 동등하며 선했다. 불평등과 예속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 기본값에서 출발하면 정치의 과제는 잃어버린 평등을 일반의지 속에서 회복하는 것이 된다.

 

세 사람의 자연상태는 그들의 정치적 결론과 분리하기 어렵게 얽혀 있다. 홉스의 자연상태가 그렇게 야만적이지 않았다면 강력한 주권자에 대한 논증은 약해졌을 것이고, 로크의 자연상태에 이미 권리가 없었다면 제한정부론은 무너졌을 것이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상태를 '구성했다'고까지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그들이 그린 자연상태와 그들이 도달한 결론이 서로를 떠받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진 자연상태가 이후의 모든 논증을 떠받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국제정치의 기본값

홉스의 자연상태가 단지 사상사의 골동품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현대 국제정치학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정치 현실주의는 국가들이 살아가는 무대를 본질적으로 무정부적이라고 전제한다. 국가들 위에 군림하는 세계정부가 없으니, 국가는 결국 자력구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안보를 위한 권력 추구가 모든 국가행동의 기본 동력이 된다. 친구도 적도 영원하지 않으며, 오직 이익만이 영원하다는 식의 격언이 이 사고의 정수이다.

 

이 기본값은 매우 강력해서, 한번 받아들이고 나면 거의 모든 국제 현상이 이 틀 안에서 설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동맹은 위협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일시적 도구이고, 국제기구는 강대국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무대장치이며, 국제법은 약자의 호소이거나 강자의 편의일 뿐이다. 협력이 일어나는 듯 보이는 순간조차 그것은 결국 권력게임의 한 국면으로 환원된다.

 

문제는 이 기본값이 정말로 국제정치의 자연상태인가 하는 점이다. 국가 간 관계가 본질적으로 무정부적이라는 명제는 그 자체로 검증된 사실이라기보다는 분석을 시작하기 위해 깔아둔 가정이다. 그런데 이 가정은 자기충족적인 성격이 강하다. 모든 국가가 상대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행동하면, 결과적으로 세계는 정말로 그렇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값이 결과를 만들고, 그 결과가 다시 기본값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순환이다.

 

다른 기본값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은 같은 세계를 다르게 본다. 자유주의적 시각에서는 국가들이 무정부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곧 만인의 투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역, 제도, 상호의존이 누적되면 협력은 합리적 선택이 되고, 실제로 많은 국가들이 그렇게 행동한다. 구성주의적 시각에서는 무정부 상태 자체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행위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의미화하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띤다. 웬트의 표현을 빌리면 무정부는 국가들이 만드는 것이다. 같은 무정부적 구조 속에서도 적대적 문화가 지배할 수도, 경쟁적 문화가 지배할 수도, 협력적 문화가 지배할 수도 있다.

 

현실주의자들이 자주 빠지는 함정은 자신들의 출발점을 분석의 결론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권력투쟁이 국제정치의 자연상태라는 것은 그들이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그들이 시작한 전제이다. 그런데도 이 전제는 종종 냉정한 현실 인식의 증거처럼, 낭만적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은 어른의 시선처럼 제시된다.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사람들은 순진하거나 이상주의적이거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자기 기본값을 자연으로 착각하는 가장 전형적인 형태이다.

 

현실주의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주의가 자신의 기본값이 하나의 이론적 선택이라는 점을 잊을 때, 그것은 분석이 아니라 신념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자기 기본값을 직시하기

문제는 우리가 홉스나 로크보다 나아진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출발점을 '인간 본연의 상태' 혹은 '상식'으로 둔 채 거기서 벗어난 모든 것을 설명해야 할 일탈로 취급한다. 자신과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결론이 다르다는 사실에 분노하지만, 정작 결론이 다른 이유는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에는 좀처럼 도달하지 못한다.

 

좋은 분석은 정교한 결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디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그 상태, 너무 자명해서 질문조차 떠오르지 않는 그 디폴트가 사실은 누군가의 적극적인 선택의 결과일 수 있다는 자각. 그 자각이 없으면 우리는 평생 자신의 기본값을 자연으로 착각하면서, 다른 기본값에서 출발한 사람들과 헛된 대화를 이어가게 된다. 자기 기본값을 직시하는 일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아는 일이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