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포페에게
자네 집값도 떨어졌다는 뉴스는 나도 들었네. 참 안되었다고 말하고 싶네. 자네 스스로 각오한 일이라니 더 별말은 안하겠네. 뭐 자네 스스로도 체념하고 있다니 그럼 다행이라고 생각하겠네. 여전히 체념하지 못한 자도 많으니 말일세. 글쎄 앞으로 집이라는 재산 가치가 뛸지 안뛸지는 잘 모르는데, 그걸 떠나서 그냥 기본적으로 생각하기를 인구는 줄고 이미 핵가족화는 다 이뤄졌고, 아파트는 늘어나는데 집 값이 절대적,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방법은 인플레이션밖에 없지 않을까. 근데 그것을 재산이 늘어난다고 볼 수는 없는 게 아닌가.
오늘은 서울 파시즘의 기원에 대해 설명해보도록 하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한국의 지금 형태의 도시화는 박정희 정권부터 본격화 되었네. 엄밀히 말하면 서울은 고도(古都)라네. 하지만 서울이 지금과 같은 서울의 도시의 기능으로 재탄생한 것은 박정희 이후이지. 지금의 서울의 모습은 피맛골이 아닌 종로의 큰 빌딩과 청계천 주위로 솟은 오피스아닌가. 그걸 생각해본다면 서울은 박정희 이후가 진정한 모습이라는 게 맞을 걸세. 더군다나 강남의 상징성이 지금의 서울에서는 적지않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더더군다나 박정희 이후의 서울이 서울이라는 얘기겠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후인 1949년 8월 13일자 대통령령 제153호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 은평면, 뚝도면 전역 및 시흥군 동면의 구로리 · 도림리 · 번대방리를 편입하여 종전까지의 서울시역 면적 133.904㎢가 268.353㎢로 2배 이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의 구역확장에 맞추어 1952년 3월 25일자 내무부고시 제23호로 서울도시계획구역을 2억 6,977만 642㎡로 확장한 바 있었다. 그런데 서울시 행정구역은 1962년 11월 21일자 법률 제1172호로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내 6개동, 광주군 내 구천면 · 언주면 전역, 중대면 내 10개동, 대왕면 내 5개동, 양주군 노해면 내 9개동, 김포군 양동면 내 8개동, 양서면 내 6개동, 시흥군 신동면 내 8개동, 동면 내 5개동, 부천군 소사읍 내 7개동, 오정면 내 2개동 합계 5개군 84개리(328.15㎢)가 새로이 편입되었다. 이때의 구역확장으로 서울시의 면적은 종전까지의 268.353㎢에서 일약 596.5㎢로 확장된 것이다. 이때의 구역확장으로 서울시의 인구수도 크게 늘어나서 1955년 센서스 때의 인구수 156만 9천명이 1960년에는 244만 5천명으로, 그리고 1963년 1월 1일 구역확장으로 그해 연말의 인구수는 325만 5천명으로 집계되었다. 1963년에 이렇게 행정구역이 확장되고 인구수도 늘어남에 따라 도시계획구역도 확장되었으니 1963년 8월 28일자 건설부고시 제524호로 수도 서울의 도시계획구역은 그때까지의 2억 6,977만 642㎡에서 그 2배가 넘는 5억 9,555만 3,000㎡로 크게 확장된 것이다. 당시의 도시계획구역 변경에 따른 이유서(理由書)는 다음과 같다.”
http://seoul600.seoul.go.kr/seoul-history/sidaesa/txt/8p5.html
1963년 서울의 확장은 사실상 최후의 서울의 확장이자 서울의 규정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네. 이때 모든 서울이 사실상 확정되었지. 그렇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서울이 지리적으로 규정된 것은 아마 이맘때일거라 생각하네. 실제적으로 영동2지구는 66년, 잠실지구는 70년에 개발이 시작되었고 대부분 계획은 80년이 시작되자 완료되었네. 아 강동은 85년까지도 이어지지만 말일세. 이 이야기는 결국 서울의 탄생은 고도로서의 서울을 관측해볼게 아니라 도시계획으로서 서울이 언제 완성되었냐는 얘기야. 그것을 생각해본다면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네, 시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박정희 정권부터 추진해온 도시계획에 대해 이후의 정권들 역시 크게 변화를 주지 않았고 그것의 변형 혹은 확대를 기했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네.
이렇게 발달한 서울은 많은 기능을 수행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네. 한국 최고의 산업기능지역이자, 한국 최대의 주거지역, 한국 최고의 상업지역이자 동시에 한국의 문화를 나타내는 고도로서의 이미지, 그리고 한국의 발전을 바로 보여주는 한강의 기적의 무대였네. 이런 서울은 서울 그자체로 끝나지 않고 파급효과를 제공하였네. 부천, 성남, 안양, 안산은 서울의 파급효과에 성장한 도시이고 동시에 이른바 신도시군이라 하는 일산, 분당, 광명, 산본 등은 이러한 파급효과에 정책적인 힘을 더욱 가해 추진한 성과라고 볼 수 있네. 이렇게 형성된 서울과 그 서울의 주변은 수도권이라는 지리적 사회군을 형성하게 되었네. 지방으로부터 산업 인구는 지속적으로 유입되었고 동시에 수도권은 본래 한국에서 강하게 나타나던 지역색을 모두 용해시켜버리는 하나의 용광로서 이른바 수도권 사회를 형성하였지. 여전히 그 구성원은 지역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수도권인’이었네. 더 이상 지방인일수 없다는거지. 수도권에 가족과 직장을 둔 사람들이 해태 타이거즈나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한다 하여도 그들은 더 이상 전라도 사람도 경상도 사람일 수 없었네. 전라도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수도권 사람이거나 경상도의 적을 둔 수도권 사람이었던 거일세.
엄밀히 말하면 한국의 민주화도 이렇게 응축된 수도권의 힘이 나타낸 저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 4.19의 주도세력이 서울 토박이들이었다면, 87년에 있었던 민주화세력의 저변은 결국 수도권 사람이었네. 이를 동교동계니 상도동계가 대표하며 그것이 지방색으로 감춘 듯 하지만 결국 민주화도 해낸 것은 수도권 사람이었네. 이는 사실 난 중요하다 생각하네. 민주화를 통해 수도권은 이전에도 그랬지만 점차 한국의 그것과 동일시 되기 시작하네. 민주화와 올림픽은 결국 수도권에서 모두 진행되지 않았나? 이전에도 수도권의 많은 기능이 집중되었지만 정치, 사회적으로 한국은 여전히 촌락과 시골이라는 지방의 이미지가 중요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와 올림픽 이후로 이른바 한국을 움직여버린 수도권은 자신의 이미지를 한국과 동일시 하고 한국내의 존재하던 다른 이미지를 자신의 이미지로 점차 대체하였네.
이른바 서울 파시즘은 결국 민주화로 본격화된 셈이지. 파급효과를 창출하려는 정책으로 서울은 경제력과 정치력을 확보하였고 동시에 수도권으로 모든 한국의 구성원을 포섭할 수 있다는 능력을 가졌다고 간주되어버린거지. 그리고 민주화로 인하여 수도권은 자신의 이미지를 한국의 이미지와 동일시해버리는 착각을 해버린거지. 하지만 수도권은 한국을 결정지어버리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어. 그 경제력에는 산업의 집중과 동시에 부동산이라는 놀라운 마법이 같이하였지. 지방의 부동산과 수도권의 부동산의 차이는 결국 서울의 경제적인 우위를 확정지어버렸네. 기존의 땅이 경제력의 차이를 가져왔다면 이제는 땅이 아닌 ‘강남 아파트’가 그것을 대체하였네. 이게 2000년대 이야기 같은가? 아닐세 1980년대 후반부터 이미 진행되어온 이야기이네. 이것이 민주화와 올림픽과 시기가 정확히 겹치지. 우연같은가?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민주화가 만들어버린 수도권의 자만을 놓친게 되는 걸세.
지배계층에 속해있던 사람도, 지배계층에 항거하던 사람도 이른바 ‘서울 사람들’은 수도권의 이미지와 한국의 이미지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 여기서 점차 수도권은 하나의 권력으로 확장되네. 이는 경제적으로 먼저 시작되어, 문화, 사회로 파급되고 마침내 정치적으로 파급될 걸세. 여전히 정치적 절대우위 확보는 여전히 진행중일세. 사실 내가 그걸 설명하기 위해 이 지리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네. 이 정도만 해도 많이 뻑뻑한거 같으이. 날씨가 덥고 소나기는 자주 내리네. 감기 조심하시게나. 그리고 부동산을 보기보다는 채권을 보시게나. 난 이 이야기를 5년전부터 하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