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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Korean Politics

다문화주의에 대한 짧은 글-한국에서의 논쟁을 중심으로.

Fulton 2011. 7. 26.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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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노르웨이에서 발생한 테러로 인해 다문화주의에 대한 말이 다시 붐이 되고 있다. 거기에 테러범께서 친히 모범국가로 ‘한국’과 ‘일본’을 언급해주시면서,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는 여러모로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러한 담론 구조는 두 가지 방향으로 생산되고 있는데 첫째는 한국도 이러한 테러가 발생할 수 있다는 담론이며, 둘째는 현재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는 무엇인가 논의하는 담론이다. 

필자는 두 가지 담론 구조 모두 사실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한국은 다문화주의를 사실 본격적으로 내딛어 본 적도 없는 국가에서 반(反) 다문화주의의 맥락의 테러를 우려해야 하며, 또한 현재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를 논할 수 있는 지에 대해 심히 궁금하다. 물론 한국이 다문화주의를 요구 받고 있는 것은 분명 사회 여러 곳에서 분명한 사실이며, 다문화주의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문화주의에 의한 반동을 지금 논의해야 하며, 그리고 한국의 지금의 다문화주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현재적인 의미로서의 규명을 해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그것이 가능한지 조차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째 담론 구조는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는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라는 실증적인 사회 차원에서 논의가 이뤄진다면 분명 의미가 있다고 본다. 다만 한 가지 필자는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다문화주의의 논위 층위 자체가 왜 철저하게 대한민국이라는 층위에서 이뤄지는가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논의의 범위를 대한민국으로 한정한 것도 아니며, 다문화주의라는 관념이 일국적인 관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는 대한민국이라는 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놀라운 일이다.

한국에서 다문화주의가 요구된 것도 이른바 노동의 Globalization이 이뤄지면서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문화가 더 이상 기존의 대한민국의 Nation 문화로서는 한계가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노동과 이주의 Globalization은 더 이상 한국인으로서 대한민국을 채우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문화로서 대한민국이 구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결국 다문화주의가 요구된 것이었다. 즉 다문화주의라는 것은, 논의를 한정지어서 최소한 대한민국에 있어서라도 그 의미는 Globalism과 떼어 놓을 수 없다. 즉 다문화주의라는 관념 자체가 대한민국의 다문화주의만 논의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의 다문화주의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이 선행되어야 만이 대한민국의 다문화주의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논의의 층위로 볼 때 보다 적합하다.

특히 한국과 같이 Nation이 국가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관념에 있어서도 강력한 위력을 가진 국가에서 Globalism이 없가나 빈약한 다문화주의는 결국 한계가 자명하다. 이른바 강한 Nation을 완화하려는 측면이 있는 다문화주의는 결국 Naitonalism과 충돌할 수 밖에 없으며 여기에서 다문화주의를 지지해줄 강한 설명력을 가진 기반은 Globalism이 될 수 밖에 없다. 다문화주의가 요구되고 그 다문화주의를 수용해야 한다면, 결국 Globalism은 과도한 Nationalism을 완화시키는 중요한 설명이 된다. 이러한 측면은 앞에서 언급한 이론적 차원에서 살펴본 논위의 층위라는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실증적 차원에 있어서도 Globalism과 다문화주의의 연결의 필요성을 잘 보여준다.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는 실재적인 사회에서 요구되어 그 담론이 관념적, 학술적인 영역으로 요구되고 있다. 이는 결국 다문화주의라는 것 자체가 무조건적인 부정이 가능하지 않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관념적, 학술적 차원에서 발생한 개념이 실재적 차원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는 허구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실재적 차원에서 요구되어 관념적이고 학술적인 영역에서 설명되고 있다면 설명의 문제에서 오류가 발생하는 있어도 이를 실증적 차원에서 부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설명의 오류를 줄이고 실증적 차원에서 다문화주의를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일국적 차원에서의 다문화주의는 사실 이론적 차원에서도, 실증적 차원에서도 모두 모순을 내포한 접근이라는 것이다. 결국 다문화주의는 Globalism의 차원에서 연결되어 설명되어야 하며, 지금의 한국에서 촉발된 다문화주의에 관한 논쟁은 이에 대한 회의론도 긍정론도 모두 논증으로서의 설명을 만족하기 어려운 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Globalization을 신자유주의로 몰아붙이는 프로파간다를 펼치는 쪽에서 다문화주의는 옹호되지만 이렇게 옹호되는 다문화주의는 결국 절름발이일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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