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과 차악, 차선과 최고를 논함에 있어 많은 사람들은 한 직선을 떠올린다. 그 직선 위에 최악부터 최선까지 주르륵 놓인 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형상화 작업을 거쳐 나온 결론이라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의 선으로의 형상화 작업은 개인의 가치 판단에 따른 결과로 인해 최종적으로 이뤄지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업은 모든 이에게 쉽게 이뤄질까? 그렇지 않다. 세상에서의 스펙트럼이라는 것은 단 하나의 선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매우 다양한 차원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이러한 차원들을 최종적인 작업으로 하나의 선으로 두고 최악, 차악, 차선, 최선으로 나누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이 선 위에 모든 사람이 일정하게 최악-차악-차선-최선을 둘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설령 놓여 있더라도 각 지점의 거리는 모든 사람마다 다를 것이며 설령 최악과 차악이 구분 불가하다거나 차선과 최선이 구분이 불가한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이것은 각 사람의 가치 체계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모든 사람은 개인의 가치체계에 따른 판단을 하지 어느 한 집단의 가치체계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참고’가 될 수 있는 것이지 지배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그런 문제에서 사회의 집단의 해악이 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판단은 존중되지는 않더라도 인정 되어야 한다. 최소한 그것이 멸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판단이 나와의 가치체계와는 맞지 않다.’라고 말을 할 수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비난의 이유나 표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다. 여기에서는 논리와 합리로서 어느 가치체계가 더 적합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며 합당한가에 대한 영역이 되지 단순히 가치체계가 나와 다르다는 것이 비난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윤리적인 전제에서 잘 못되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잊곤 한다. 각자의 가치체계가 자신의 가치체계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최악-차악-차선-최선으로 극명하게 확 드러나는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으며, 아예 이런 선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한 선의 방향이 아예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저 최악이 아니라면 차악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스펙트럼 위에서고 자신의 인식 위에서 전개되는 논리이지 만인이 그렇다고 하는 것은 이미 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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