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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Korean Politics

안보 결핍과 안보 과잉의 사이

Fulton 2015. 7. 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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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만큼 안보가 강조되는 사회도 드물다. 그런 동시에 국민들에게 안보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질타하는 사회도 드물다. 이런 모순은 사실 설명 가능한 모순이다. 본래 안보의 총량이라는 것을 물질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면 자국의 동원 가능한 자원의 반비례하고, 위협에 정비례한다. 한국에 가해지는 위협 자체가 적지 않기 때문에 현재 한국에서 인식하는 안보의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언제나 안보라는 것은 안보가 달성된 상태는 절대적인 상태지만, 안보를 달성하는 과정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이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안보에 대한 인식과는 별개로 2007년 국방연구원의 여론조사 결과처럼 한국의 안보의식이 낮다라는 평가가 61%로 국민들 사이에 다수적인 의견으로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과연 그 안보의식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글과 미디어에서는 ‘안보의식’과 ‘국가수호의지’를 동일시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게 안보인가하는 문제이다. 안보라는 뜻 자체가 근심 걱정이 없는 평안한 상태라는 사전적 정의를 뒤로 하더라도, 안보의식이 무조건적으로 국가수호의지로 이어지는 것은 어쩐지 좀 많은 논리적인 간극을 필요로 한다. 과연 투철한 국가수호의지를 가지는 것 만이 안보의식과 연결되는 것인가? 이는 탈냉전 이후 안보영역의 확장이라는 현상을 생각해 봤을 때 시대와 맞지 않는 개념이다.


인간안보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한번 더 나아가 북한이라는 위협이 강하게 실존하는 한반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안보라는 개념이 국가안보와 동일시 되더라도,  안보의식 = 국가수호의지로 이어지는 논리는 여전히 문제를 가진다. 과연 ‘의지’가 의식인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의식은 의지인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안보의식을 국가안보의식으로 한정 짓더라도 안보의식은 어떻게 한국의 안보를 지켜야 하고,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가에 대한 관념적 총체일 것이다. 그것이 단순히 우리가 지킨다 혹은 하면 된다고 설명하는 것은 냉정하게 말하면 코미디에 가깝다.



예를 들어 우리가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대응하는 ‘억제’가 어떻게 가능하며, 그것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 지가 안보 의식인 것이지 그냥 우리가 우리를 지킨다고 외치는 ‘의지’는 안보의식으로 이어질 수 없다. 이른바 주의주의로 안보의식을 구성할 수 있고 안보를 달성할 수 있다면 2차대전에서 그렇게 의지를 강조한 일본군은 왜 패망했고, 중국의 대약진운동은 왜 실패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안보라는 것은 분명 실증적인 면이 적지 않고 따라서 안보의식도 이러한 실증으로 접근을 할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로 ‘의식’을 만든다는 것은 매우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의지는 의식을  만드는 한 개체이지 의지가 곧 의식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실증의 영역이 아닌 신앙의 영역이다.



대약진운동, 천리마운동, 스타하노프 운동..... 대일본 제국까지... 주의주의는 계속된다 주욱~


게다가 이러한 안보의지가 의식이 되는 관념은 ‘안보만능론’이 될 개연도 존재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안보의지만능론이다. 하지만 사회가 안보를 달성하는 것이지, 안보가 사회를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말과 마차의 문제와도 같다. 단견이지만 한국사회는 안보의식의 결여와 안보의지의 과잉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지 모른다. 의지가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의지로만 무엇이든 이뤄지지 않는다. 무엇으로 그 의지를 실현할 수 있고 그것이 실증가능한가가 보다 더 중요하고 필요한 논의이다.  의지만으로 이룰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한편의 판타지일 뿐이다. 이제는 아마도 티아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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