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곳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국부로 모시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 사실이고, 그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고 건국 후에 있어서도 많은 일을 한 것도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국부가 되려면 다음과 같은 반론을 넘어야 한다.
1.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되어 있다.여기에 불의는 당시의 제1공화국과 자유당 정권을 의미하며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이승만 대통령은 당시의 정치적인 책임자로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여기에 불의에 해당하는 그 정부 책임자를 국부로 내세운다면 기존의 대한민국 헌법과 이승만 국부는 불합치하게 된다. 법치주의와 입헌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이승만 국부론을 얘기할 때 머리가 갸우뚱 해지는 것은 위의 이유와 같다.
2. 전쟁 기에 혼란한 상황에서 벌어진 여러 일들에 대해서 과감히 이해를 해준다 쳐도,(서울을 사수하겠다고 말하고, 한강교 폭파를 한 것에 대해서는 과연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제 1공화국에서 발생한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 이승만 정부는 민주공화정 이념에 부합하는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의 국부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에 입각한 그의 정치적 행동이었다. 물론 타국의 사례에서도 권위주의적이었던 국부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드골마저도 정치적인 반대파였던 샤르트르에 대해 “그도 프랑스야”라고 하였으며 더불어 자신이 강하게 주장한 체제 개편에 대한 부결에 대해 사사오입이나 부정선거를 한 것이 아니라 사임을 선택하였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주장한다면, 민주공화정을 존중한 사람을 국부로 모시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 체제와 이승만 국부론의 모순을 해결하는 문제가 남는다. 물론 한국 사회가 민주공화정을 제창하지 않는 사회라면 이런 문제는 상관 없겠지만.
3. 더 나아가 굳이 국부가 필요한가에 대한 반론이 남는다. 이른바 국부라는 것이 존재하는 상황은 일종의 ‘가부장주의’적인 산물이고, 국가를 하나의 개인이 이룩했다는 사유적 개념이 필요한 지에 대해서 반론이 필요하다. 그만한 업적을 남겼는가와 더불어 과연 그가 국부로서 필요 불가결한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평가가 필요한 것이다. 콘라트 아데나워, 오렌지공 빌렘, 시몬 볼리바르, 조지 워싱턴 모두 이러한 반론에 부딪혔고 그것을 통과한 인물이다. 국부라는 개념을 ‘가부장주의’적 접근이나 국가를 개인화한다는 논리에 대해 그래도 그만한 평가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논리적인 반론을 제시해야 한다.
이승만 전대통령이 국부가 되기 위해서는 저 세 가지의 문제를 넘어야 할 것이다. 필자를 가르쳤던 돌아가신 김일영 선생님도 강의시간에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박한 부분이 있다라고 말을 하셨지만 그가 국부에 위치해야 한다고 단언한 적은 없었다. 김일영 선생님의 저서인 건국과 부국에서도 이승만 정부의 선택이 그 당시의 맥락에서 합리적이고 불가피하였음을 드러내는 것이지, 이승만 전 대통령이 국부에 위치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서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위의 언급한 저 세 가지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 세 문제를 돌파 할 수 있다면 이승만 국부론은 성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세 가지를 해결하지 않은 채 국부로서의 이승만을 논한다면 그것은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동의 받지 못하는 국부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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