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드 라 투르, 「사기꾼」(cheater with the ace of diamonds), 1635년경 루브르 박물관 설리관 거의 구석 오브 구석(찾으려면 좀 각오하셔야 할듯)
파리 여행 도중 가장 크게 실망했던 한국에서 들려온 소식은 박노자 교수의 칼럼이었다. 칼럼을 보면서 든 생각은 이 분이 감 떨어진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떨어진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일단 방법론적으로 대한민국의 사회적 지표를 제정러시아와 비견하면서, 다른 OECD국가들의 지표와 비교하는 데, 이는 상대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맞지만 질적인 차원에서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지에 대해서는 담보해주지 않는다. 다만 그는 여기에서 이러한 상대적 차이가 ‘절대적 차이’라고 확언을 하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인 ‘국력’과 ‘민중 행복지수’의 불일치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그가 보여준 지표는 어디까지나 상대적 차이의 문제이다. 그리고 에스토니아에 대해서 하나 언급하자면 제작년에 있었던 대규모 해킹사태 때, 그 국가의 신용등급이 어떻게 흔들렸는가에 대해서 반문하고 싶다. 과연 한국과 에스토니아는 비교 대상이 될 수나 있는가?
더 충격을 받게 된 건 다음 주장이었다. 이민은 이른바 민란과 비교하면 헬조선에 대한 보수적인 꿈일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이 ‘성장신화의 지속’에 근거하여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되묻고 싶다. 한국에서 ‘민란’이 선택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가설을 채택해야 한다. 1. 민란이 일어날 수준이 아니다, 2. 1번이 아니라면 한국인들은 ‘민란’을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지 않는다. 이 두 가지의 가설로 말이다. 아마 박노자 교수는 2번에 입각하여 이것이 성장신화의 지속에서 근거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엄격하게 말하면 지금의 헬조선 세대는 애초의 성장신화의 수혜를 길게 쳐봤자 유년기 5-10년을 누려본 세대다. 그렇게 말하면 여기에 근거한다고 말하기 보다는 다른 변수를 언급하는 게 맞지 않은가?
한국에서 왜 젊은 세대는 ’민중봉기’가 선택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필자는 박노자 교수가 말하는 것 처럼 먼저 누가 이러한 구조를 만드는 데 기여했는가, 그리고 그 구조의 저항은 어떠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는가라고 되묻고 싶다. 첫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본인도 칼럼에서 언급하고 있다. 현재의 주류 야당의 집권기가 오히려 이러한 시스템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어느 정도 견고해졌으며 더불어 그 이후의 그 구조의 저항의 결과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말해보자, 촛불시위는 무엇을 바꿔놓았는가? 세월호의 노란 리본은 그 상징 외에 국가 구조에서 어떠한 점을 변하게 하였는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박노자 교수가 참여한 진보정치는 책임이 없는가? 군부권위주의 시대를 겪은 세대는 시위에 의한 효능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지금 세대는 과연 저항에 의한 효능감을 획득할 수 있었는가? 그 저항의 과정에서 효능감보다는 오히려 무기력과 낭패만을 학습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게 더 맞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는 게 맞을까? 그것을 젊은 헬조선인들에게 돌려주는게 과연 합당한가?
이러한 지점을 말하지 않고, 고작 성장신화의 지속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말하는 점은 굉장히 무책임한 점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들이 주도하고 기획한 저항의 실패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사회 기반에 깔려 있는 문화적 요인을 직접적인 근거없이 맥락만으로 언급하는 것은 사실 오히려 다른 맥락이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탈맥락적인 표현이다. 시위나 저항이 필요하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문제가 시위나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왜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해서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되는 것이 아닌가. 실패와 파산을 반복하고서 역시 그것만이 해답이다라고 한다면, 왜 그것이 해답인지 매우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보여줘야 한다. 냉정하게 헬조선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는 데에는 박노자 교수 자신의 책임도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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