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you have I been absent in the spring,

전주 이야기

-2- 전주의 공간, 객리단길, 힙스터 문화의 이식

Fulton 2020. 12. 4.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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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힙스터, 혹은 트렌디한, 혹은 힙한 문화를 지적하자면 90년대 후반부터의 홍대 거리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소상공인 중심의(혹은 그렇게 보여지는) 행위자들을 기반으로 좁은 거리와 골목 중심을 기반으로 2-30대의 소비를 겨냥한 문화가 바로 오늘 날의 힙스터문화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서울에서도 수많은 변형을 거쳤는데 망원과 상수동으로 확장되었고, 가로수길과 도산공원에도 제한적이나마 영향을 주었고, 이태원과 한남 주변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문래동과 성수동, 그리고 더 나아가 익선동과 을지로에도 크나큰 공간적 변형의 원형이 되었다. 물론 더 거슬러가자면 일본의 다이칸야마나 지유가오카, 시모기타자와가 언급이 되겠지만 이는 사업모델의 문제가 아니라 ‘힙’한 문화의 전형을 어디에서 모티브를 얻었는 지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조금은 다르다.

 

이 과정에서 전형이 생겼는데 임대료가 낮은 지역에서 소상공인과 이를 후원하는 자본이 터를 잡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며 이것이 성공할 시에 붐을 만들어 거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그 뒤에 젠트리피케이션이 따르고 심지어 서울에서는 이를 이제 자본이 전적으로 추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는 지방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사실 지방은 그런 것이 있는 지도 몰랐을 때가 더 길었다고 해야 한다. 오히려 지방의 젊은 세대의 소비문화 거리와 가장 유사한 거리는 성신여대 인근의 돈암동 거리나 건대입구 주변의 거리가 더 흡사하다. 이른바 홍대형의 힙한 거리는 지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특히 광역시보다 작은 규모의 전주에서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전주의 객리단길은 본래 쇠락한 거리였다. 객사주변이야 전주의 그나마 번화가지만, 사실 북대앞과 비교하면 왜소하였고 소비규모도 크지 않았다. 심지어 객사주변에서 거리가 있는 객리단 길은 망한 음식집, 망한 여관, 그나마 장사가되는 콩나물 국밥집의 구성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객리단길이 되는 과정에서는 세 가지의 동력이 작동했다.

 

첫째는 전주 국제영화제였다. 영화제 판이 알다시피 힙한 문화를 추구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고 가는 곳이고 객리단길은 전주의 극장들이 놓여져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이 동네는 이러한 힙한 문화를 영유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노출되는 곳이었고, 따라서 익숙함을 전주 국제영화제는 이 객리단길에 부여하였다.

 

둘째는 물적인 동기로서 전주의 한옥마을이 서울에 알려지면서 전주 구도심의 낮은 임대료가 부각되었다. 서울과의 임대료 차이는 전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분들에게 충분한 동기가 될 수 있었다. 실제로 서울의 점포에 대한 분점이나 혹은 이른바 출장소 형태의 상점을 차리는 것이 이 낮은 임대료에서는 충분히 가능하였다. 그리고 소비 타겟은 전주 한옥마을을 비롯한 전주에 방문한 관광객으로 충당한다는 전략도 어느 정도 가능하였다.

 

마지막으로는 트리거로의 동기이다. 이를 시작하게 한 것은 삼백집이라고 생각한다. 삼백집이 오기사님의 리모델링(사실상 리빌딩)의 설계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면전에다 대고 쌍욕한 욕쟁이할머니집으로의 정체성에서 모던한 음식점과 국밥집으로의 전환이 되면서 이 거리 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물론 삼백집만이 이러한 시도를 하였고 이는 단순히 삼백집이 아니라 삼백집 프랜차이즈 전반에 대한 변화가 있었지만, 국밥집으로 전환하면서 옆의 카페에도 서울의 모던한 인테리어를 적용하였고 이는 이 거리 전반에 자극이 되었다.

 

그 결과 전주 규모의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이른바 힙한 거리가 객리단은 자리잡게 되었다. 왜 하필 객리단인가에 대한 질문은 전주 국제영화제가 해줄 것이고, 물적인 동기는 당시 저렴했던 임대료와 지대가 가능하게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누가 이를 시작하는 트리거였는가에 대해서는 삼백집과 이를 집행한 오기사님이었다는 주장을 하고 싶다. 물론 이에 대한 소비에 있어서는 전주 사람이 아니라 주로 전주의 외지인들이 이를 하고 있고 전주 사람들은 여전히 이에 대해 굉장히 낯설어 하는 모습들을 보인다. 왜 전주 규모의 도시에서 불가능한 ‘문래동틱한/혹은 상수동틱한’ 동네가 가능했는가에 대해 묻고, 전주에서 서울의 익숙함과 서울의 낯섬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컨텐츠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실제로 많은 건물의 운영 주체가 전주 사람들도 아니고 서울 사람들이 되었고, 실제로 서울의 저 힙한 문화의 컨텐츠들이 거의 그대로 이식된 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가격은 전반적으로는 서울보다는 조금은 착한 것 같은데, 내 주변 전주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왜 그 가격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는 듯 하다.

 

신시가지와 객리단길을 했으니 과거의 전주의 젊은 세대문화를 논하기 위해서는 북대앞 이야기를 해야 한다. 신시가지가 한국 도시의 번화가와 번화가에 대한 욕망을 반영하였고 객리단길이 힙한 문화와 그 힙스터들의 욕망이 반영된 곳이라면, 전주는 원래 어떠 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북대앞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게 논의의 순리라면 순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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