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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야기

-3- 전주의 공간: 북대 앞에서

Fulton 2020. 12. 8.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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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는 전대로 불리길 원하지만 그 누구도 전대로 부르기 보다는 북대로 부르는 곳의 구정문 앞은 단순히 전주를 넘어서 전라북도 전체에서도 상징적인 공간이다. 한때는 전라북도 전체에서 유일하게 2-30대 유흥문화의 사실상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 공간을 신시가지앞에 내놨지만, 북대 앞은 여전히 복잡한 공간의 모습을 보였다.

 

대략 북대의 기능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대학가로서의 기능을 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두 가지의 기능이 파생된다. 파생되는 기능으로 둘째는 대학생들의 주거공간의 기능을 하는 동시에, 셋째는 대학가를 지탱하는 상업지구로의 기능을 하였다. 다만 여기에서 단순히 대학가로의 상업지구의 수준을 넘어서, 전북전체에서 가장 번화한 상업지구로의 기능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동시에 전주의 실내체육관과 삼성문화회관을 통한 문화-공연 기능까지도 수행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덕진공원과 전북대가 제공하는 녹지로 인해 휴식공간으로의 기능까지도 수행하였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업무지구외에는 모든 기능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는데 심지어 전주의 CBD가 전북대에서 거리적으로 굉장히 밀접하다는 점에서 업무지구와의 유기적 결합이 아예 없었다고 할 수 없다.

 

북대 앞이 복잡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일단 대학가는 대체로 종합적인 공간이 되기 때문에 공간의 복잡성을 보이게 된다. 둘째는 이 기능분화성 이론에 따라서 이 지역의 발전 정도가 서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높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대학앞의 공간의 기능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전주 아니 더 나아가 전북 전체의 번화가이자, 대학생들의 거주 공간, 동시에 전북대가 제공하는 녹지공간 등 굉장히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 따라서 산책할 수 있는 공원과 동시에, 대학을 지원하는 상업 및 주거 기능, 더불어 전북 사실상 최대의 번화가 기능을 수행하는 굉장히 복합적인 모습을 보였다.

 

북대라는 공간의 전성기를 따지자면 전주의 구시가지 몰락과 함께한다. 전주는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 급격하게 이른바 구시가지와 객사 주변의 상권이 약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유는 조금 복잡하긴 하나 전주 전반의 경제가 나빠지는 관계로 이미 몰락해버린 구시가지는 더더욱 쇠락했고, 객사주변도 극단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학은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이를 이끌 힘이 있었고, 객사주변의 상권이 몰락하자 대안이 없던 전북의 사람들은 전북대 앞으로 몰려왔다. 이 시기의 전북대는 전북 전체에서 엄청난 흡수력을 보였고, 사실상 대부분의 상권이 전북대 앞으로 몰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북대 앞이 전라북도라는 지역 전체에 주는 함의는 적지 않다. 제조업 벨트가 대부분 군산에 몰려 있지만, 문화적으로 군산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없던 2000년대 중반까지 전주는 유일하게 전북의 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북대앞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단순히 전주의 북대앞이 아니라 사실 전북 전체의 번화가가 되어야 했다. 다만 당시의 분위기를 묘사하자면 2000년대 중반까지 북대 앞과 서울에서 제일 유사했던 동네는 대학로나 종각이라기보다는 현대백화점이 없는 신촌에 가까웠다. 뭔가 블럭도 정리되어 있지 않았고, 정말 기능적 분화가 되지 않은 그런 번화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이 북대앞이었다.

 

당연히 그러다 보니 이점과 문제가 교차하게 되었다. 이점이라고 하면 위에서 말한 북대가 전북 전체에서 대체불가능한 유일한 공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교차하는 범죄율이었다. 여러 티비프로그램에서 알려진 것같은 사건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북대앞은 범죄가 적은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범죄율이 높았다고 보는 것이 보다 수치적으로 적절하다. 이것마저 신촌과의 유사성이라고 한다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촌의 범죄율이 주거지역 범죄와 상업지역의 범죄가 중첩되는 공간인 것처럼, 북대 앞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 지역의 기능적 복합성과 거주-체류 밀집도가 굉장히 높을 때만 발생하는 현상임을 고려해야한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가 원인이라 할 수 없지만, 북대앞의 전성기는 곧 전북, 전주의 발전정체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혁신도시와 신시가지가 뚫리면서 급격히 전북대 앞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실제로는 이러한 힌트는 2000년대 초반에 아중리-중화산동의 모텔촌이 개발되면서부터 북대 앞의 모텔들이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이미 찾을 수 있었다. 이미 북대 앞은 어느 정도 공간 기능의 포화와 문제들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는 신시가지와 혁신도시 개발, 특히 신시가지의 개발로 인해 그 번화가로의 기능이 그대로 옮겨가게 된다. 지금의 신시가지의 모습은 건물이 새건물일 뿐 북대앞에서 보이던 모습이 그대로 반복되어서 보이고 있다. 물론 신시가지가 보다 전북의 욕망에 충실했던 감은 있지만, 그 욕망의 근간에는 북대의 모습이 그대로 있었다.

 

지금의 북대 앞은 전성기에 비하면 분명히 쇠락한 것이 맞다. 전주를 갈때마다 찾던 전주의 거주하던 외국인 강사들이 찾고 유학생들이 주로 알바하던 바도 사라졌다(무척 유감이다). 다만 이것에 대해 과거로의 북대앞의 영광을 복구하기보다는 새로운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분명 과거의 북대앞은 순기능이 적지 않고 전북 전체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문제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중과 순기능은 북대앞이 매력적인 공간이었다기 보다는 전북의 낙후가 구성한 공간이었다는 지점에 있다. 따라서 북대앞은 북대앞이 가지고 있는 인프라를 기반으로 하여 어떻게 새로운 공간으로 구성해야 하는가를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

 

사실 전주에는 과거의 몰락한 공간이 새롭게 구성된 곳이 하나 있다. 그곳은 전주에게 다시 부흥을 안겨줬다고 표면적으로 내세울 만한 공간인 한옥마을이다. 궁극적으로 북대앞의 모델이 한옥마을이 될 수 있을지, 아니면 보다 많은 모색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다음 한옥마을을 다루면서 논해볼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살짝 곁들여볼 것은 북대앞에 대한 노래이다. 북대를 친숙한 공간으로 둔 전북대생이나, 전주에 기반을 두고 살았던 사람은 이 노래의 가사에 대해 전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북대앞에 다들 그럴만한 추억을 나와 나와 비슷한 공간을 누볐던 사람들은 가지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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