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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야기

-4- 전주의 공간 : 한옥마을, 욕망의 협상게임

Fulton 2020. 12. 1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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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한옥마을은 도시의 레거시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형의 결과이다. 그리고 이러한 레거시는 단순히 레거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레거시가 어떻게 재생산되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전주 한옥마을이 오늘 날 전주가 관광지로 부상하게 될 메카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그 이전에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붐’과 ‘힙’을 전망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한옥마을이 선택된 이유는 이른바 명확하지 않다. 엄밀히 말하면 명확할 수 없었다. 전주 한옥마을이 핫한 여행지로 먼저 선택된 것이 아니라, 전주가 사실 선택되었고, 그 전주에서 이른바 매개적인 코어로 기름부음 당한 곳이 한옥마을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먼저 전주가 선택된 이유는 잘 알다시피 이른바 국내 관광이 기존의 관광명소를 통해 형성된 문화가 아니라 다른 관광문화가 형성되면서 전주가 관광지로 부상되었다. 다만 전주가 관광지로 부상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관광지로의 편의성을 제공하는 허브가 전주 내에서는 부재해 있었다. 사실 이러한 허브가 형성되는 이유는 관광행위자의 휴리스틱을 증진해주는 동시에, 관광공급자에서의 상업적 효율을 증가하기 위한 목적에서 기인한다. 서울의 종로가 점차 호텔이 증가하는 이유도 그렇고, 베트남의 관광발전 역시 허브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허브 육성이 관광정책의 중심이 되는 이유도 사실 여기에서 기인한다. 전주의 허브로 선택받은 곳은 바로 이 한옥마을이었다.

 

한옥마을이 선택된 이유에는 한옥마을의 특유의 정취도 있었지만 이른바 운과 우발적 요인이 이 지점에서 작동하였다. 한옥마을은 본래 전주 경기전-향교 주변의 한옥을 보존하기 위해서 보일러 설치마저도 구청의 허가가 있어야 했다. 즉 보존 자체가 목적이지, 관광자원 유치의 목적이 전혀 아니었다. 따라서 실제로 한옥 소유의 가치는 굉장히 낮았고 실제로 거래되던 가격이 2000년대 초반에 8천만원 대에 거래가 되는 등의 행태가 나타났다. 사실상 전주 한옥마을은 경기전 옆에 인접한 슬럼가가 되고 있었다. 경기전은 전주시민들의 일종의 쉼터같은 느낌으로 기능하고 있었지만, 한옥마을은 정말 퇴락한 공간 그 자체였다. 이러한 퇴락한 공간을 되살리고자 관광목적에서의 부흥을 전주시는 기획하였다. 엄밀히 말하면 정교한 기획이라기 보다는 뭘 해도 안되니 한옥을 보존하는 차원에서의 관광업을 한다면 그것을 밀어준 차원이 컸다. 쉽게 말하면 인디언들이 도박장을 열자 그것이라도 해라라는 식으로 지원해준 미국의 몇몇 주와 유사한 행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전주시가 소유하던 한옥에 이른바 ‘왕손’도 모셔오게 되고 전주의 관광 컨텐츠들을 한옥마을 안에 유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재미있는 것은 한옥마을이 기존의 가지고 있던 컨텐츠와 새로운 한옥마을 컨텐츠가 어우러져 버렸다. 먼저 기존의 있었던 컨텐츠라고 한다면 전동성당과 경기전과 같은 명소와 전주 사람들 20년전부터 맛이 변해버렸다고 개탄한 ㅂㅌㄹ칼국수 집이었다. 새로들어온 컨텐츠들은 전주에서 음식점의 분점들이 여기에 들어왔다. 재밌는 지점은 전주사람들에게 1티어로 여겨지던 음식점들보다는 주로 2티어의 음식점들이거나 이제 막 부상하고 있던 음식점들이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컨텐츠들은 한옥이라는 공간을 활용한 카페들과 게스트하우스였다. 전주는 매우 오랜시간동안 수요에 비해 카페가 부족한 동네였으며, 게스트하우스는 밀어닥치는 관광객들을 수용할만한 중요한 시설이었다. 한옥마을 공간의 기능이 재편되면서 한옥마을은 정확하고 관광 소비자와 공급자들의 욕망이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다. 관광소비자들은 정보의 부재로 인한 문제들을 이른바 관광복합단지로 재탄생한 한옥마을을 통해서 효용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었으며, 공급자들 역시 관광 컨텐츠의 접근성을 높이는 동시에 기존의 전주 소비자들을 두고 경쟁하기 보다는 외지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여 수익을 극대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한옥마을은 결국 소비자에게도 공급자에게도 모두의 욕망이 만나 결합된 공간이 되었다. 굉장히 기형적이고 다른 전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 열리며, 주변 다른 전주의 공간과 굉장히 연계성이 떨어지는 이질적 공간이 되었지만, 그것은 소비자와 공급자 모두가 원하던 결과였다. 동시에 과거의 한옥마을과 지금의 한옥마을이 역사적 이질성 마저 심해졌다. 과거의 향교-성심여고-전동성당-경기전으로 만들어지던 공간은 지금의 공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기능적으로도, 외형적으로도 이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되었다.

 

모두의 욕망과 그 욕망의 협상게임이 비롯한 공간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려의 목소리는 지금도 나오고 있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창출된 공간이 가치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국 이른바 행정에서의 선택과 공급자와 소비자의 협상게임의 결과가 이렇다면, 그것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라고 말하기에는 어렵다. 물론 일종의 ‘관광식민지’가 되어버린 전주를 보여주는 지적은 적절할 수 있지만, 소비자와 공급자의 협상게임의 결과물이 잘못되었다라고 할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지적해야 한다면 소비자와 공급자의 권력게임의 문제를 지적해야 타당할지도 모른다.

 

이른바 외지인과 내지인의 욕망의 교차가 이러한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사실 신시가지-객리단길 편에서도 계속 언급했던 주제이다. 이러한 교합은 기존의 전주에서 찾을 수 없던 이질성을 낳았다는 것은 분명하고, 다만 한옥마을의 결과는 양측의 욕망의 특징보다는 양측의 편의의 최적화 과정에서 나온 점에서 특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기존의 공간이 가지고 있던 역사성을 압도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점은 전주의 한옥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이른바 ‘한옥마을’ 명소는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문제로 보인다.

 

전주 내지의 욕망을 말하기 위해서는 전주의 생활공간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서신동을 당연히 언급해야 하나, 서신동은 이미 기존에 잘 쓰여져 있는 글이 있으니 그것에 대한 보론을 쓰는 차원으로 진행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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