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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International Politics

길핀의 패권전이이론과 트럼프 행정부의 선택

Fulton 2025. 7. 8. 16:31

 

로버트 길핀의 패권전이이론은 국제정치 변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틀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결정론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길핀은 패권국의 쇠퇴를 마치 자연법칙처럼 필연적인 과정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인간의 선택과 정책 혁신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한다. 실제로 역사는 창의적 리더십과 제도 혁신을 통해 쇠퇴를 늦추거나 역전시킨 사례들을 보여준다. 19세기 말 영국이 '팍스 브리타니카'를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이나, 냉전 종식 후 미국이 단극 체제를 30년 이상 유지한 것은 단순한 구조적 요인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국의 패권 전이는 결코 예정된 운명이 아니며, 정책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경로를 걸을 수 있다. 문제는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길핀이 경고한 '최악의 시나리오'를 자초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기구 탈퇴: 규범 설정자에서 규범 파괴자로

트럼프 행정부의 국제기구 정책은 미국이 스스로 구축한 질서를 파괴하는 역설적 행태를 보여준다. 트럼프 1기에는 파리기후협정 탈퇴, 이란 핵합의(JCPOA) 파기, 유네스코(UNESCO) 탈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철회 등 다자협정과 기구 이탈을 거듭했다. 특히 WTO에 대해서는 "미국에 불리하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WTO 분쟁해결기구 상소기관 인준을 고의로 지연시켜 사실상 기능 정지 상태에 빠뜨렸다.

 

2025년 재집권 후에는 이러한 행태가 더욱 극단화되었다. 트럼프는 취임 당일 WHO 탈퇴, 파리기후협정 재탈퇴, OECD 국제법인세 합의 철회를 일괄 발표했으며, 미국이 가입한 거의 모든 국제조약과 기구에 대한 전면 재검토를 지시했다. 더 나아가 "미국 이익에 맞지 않으면 동맹 안보공약과 국제법적 의무도 이행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단순한 회비 절약의 문제가 아니다. 길핀이 강조했듯이, 패권국의 핵심 역할은 국제 공공재를 제공하는 것이며, 국제기구는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다. IMF와 세계은행은 달러 패권을 뒷받침하고, WTO는 미국 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보호하며, UN과 각종 국제기구는 미국적 가치와 규범을 전파하는 수단이었다. 트럼프는 이러한 기구들이 사실상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계되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동맹의 가치를 거래로 축소시킨 대가

트럼프 행정부의 동맹 정책은 길핀이 경고한 함정의 전형적 사례다. 2018년 NATO 정상회의에서 트럼프는 보좌진에게 NATO 탈퇴 검토 가능성을 타진했으며, 주한미군 주둔 비용으로 연간 약 50억 달러라는 기존의 5배에 달하는 금액을 요구했다. 2024년 선거 캠페인 중에는 "동맹국들이 돈을 내지 않으면 절대 방어해주지 않을 것"이며 "러시아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할 것"이라고까지 발언했다.

 

이러한 거래적 접근의 결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유럽에서는 "NATO를 트럼프 방탄화(Trump-proofing)해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었고, 동맹국들은 미국 없이도 안보를 지킬 수 있는 독자적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전 안보보좌관 존 볼턴은 "트럼프 2기에는 거의 확실히 NATO 탈퇴로 갈 것"이라고 예측했으며, 실제로 트럼프는 2025년 초 "NATO 집단방위 의무(Article 5)는 무조건적이지 않고 조건부일 수 있다"고 발언했다.

보호주의가 초래한 역설적 결과

트럼프의 관세 정책은 동맹국과 적대국을 구분하지 않는 무차별성을 특징으로 한다. 로이터 통신의 2025년 4월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전 세계 대부분 국가에 일률적으로 10%의 "기본 관세(baseline tariff)"를 부과했다. 중국산 제품에는 누적 약 54%, EU산 제품에는 총 20%의 관세가 적용되었다. 트럼프는 이를 "경제 혁명"이라 자평했지만, 발표 직후 S&P 500 시가총액이 2일 만에 5조 달러가 증발하는 등 극심한 시장 혼란이 발생했다.

2025년 7월에는 주요 동맹국들을 포함한 14개국에 대해 추가 관세를 부과했다. CNBC 보도에 따르면, 일본 총리 이시바 시게루는 일본 수입품에 대한 25% 관세 부과를 "진정으로 유감스럽다"고 표현했으며, 태국 재무장관은 자국에 부과된 36%라는 가장 높은 관세율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한국(20%), 일본(25%), 말레이시아(25%) 등 미국의 전통적 안보 동맹국들도 예외 없이 높은 관세의 대상이 되었다. Hinrich Foundation의 데보라 엘름스는 "ASEAN 회원국들이 협상을 위해 노력했지만, 워싱턴을 방문하지 않았거나 초대받지 못한 국가들과 거의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고 지적했다.(https://www.cnbc.com/2025/07/08/trump-tariff-letters-japan-southkorea-fresh-deadline.html)

 

더욱이 트럼프는 2024년 말 "BRICS 국가들이 달러 패권에 도전할 경우 모든 수입품에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이는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강압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지만, 길핀이 분석했듯이 패권 통화의 지위는 군사력이나 경제 제재가 아니라 신뢰와 편의성에 기반한다. 오히려 이러한 위협은 해당 국가들의 탈달러화 움직임을 가속화시킬 위험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세 전쟁이 미국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트럼프 1기의 경험이 이미 보여주듯, 대규모 관세 부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무역적자는 줄지 않았고, 중국은 제3국 경유 수출 등으로 교묘히 대응했다. 오히려 관세로 인한 비용 증가는 미국 제조업과 소비자에게 전가되었고,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만 가속화시켰다.

 

길핀이 지적했듯이, 패권 유지의 핵심은 보호막이 아니라 지속적인 혁신과 생산성 향상에 있다. 1980년대 일본과의 무역 마찰 당시에도 미국이 결국 우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관세가 아니라 정보기술 혁명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무시하고, 동맹국들까지 고민하게 하는 무차별적 관세 정책으로 미국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다.

패권 유지 비용의 재평가

길핀의 이론에 따르면, 패권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높아지는 비용 부담에 직면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를 단순히 "미국의 관대함"을 착취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국무부 예산과 대외 원조를 대폭 삭감했다. 그러나 이는 비용과 편익에 대한 근시안적 계산이다.

 

국제기구 분담금, 동맹 방위 비용, 개발 원조 등은 단순한 지출이 아니라 미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투자다. 예를 들어, UN에서 미국의 거부권, IMF에서의 의결권, 동맹국들의 군사기지 제공 등은 모두 이러한 '투자'의 대가로 얻은 특권이다. 트럼프는 이러한 장기적 이익을 무시하고 단기적 비용만을 계산하고 있다.

결론: 구조가 아닌 선택의 문제

미국이 직면한 도전 - 중국의 부상, 동맹국들의 무임승차, 국내 제조업 쇠퇴 - 은 분명 실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전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악화시키고 있다. 국제기구를 탈퇴한 결과 규범 설정 권한을 상실했고, NATO 동맹국들을 압박한 결과 오히려 유럽의 독자적 방위 논의가 강화되었으며, 동맹국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관세를 부과한 결과 미국의 신뢰성과 소프트파워가 훼손되었다. 길핀의 패권이론은 미국의 쇠퇴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패권국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쇠퇴를 늦추거나 가속화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은 불행히도 후자의 경로를 택하고 있으며, 이는 외부의 압력이 아닌 내부의 선택에 의한 자발적 쇠퇴가 되거나 그 쇠퇴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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