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정치학, 특히 Realism과 Realpolitik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과연 Realism은 정말로 'real'한가?"라는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Realism이 그리는 세계가 오히려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현실과 괴리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다시 말해, Realism이 ceteris paribus(다른 조건이 일정할 때)라는 가정 하에 너무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John Bew의 "Realpolitik: A History"는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Bew의 책은 Realpolitik의 기원부터 현대적 적용까지를 추적하면서, 이 개념이 어떻게 변화하고 해석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19세기 중반 독일의 Ludwig von Rochau가 처음 사용한 Realpolitik은 단순히 '현실주의적 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현실을 분석하는 방법론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우리가 흔히 Realism과 연관 짓는 단순화된 권력 정치와는 다른, 보다 복잡하고 nuanced한 접근이었다.
Bew는 Realpolitik이 영미권에 도입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자세히 다룬다. 특히 냉전 시기 미국에서 Realpolitik은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해석되었다. Henry Kissinger의 Realpolitik은 비스마르크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으며, 미국적 예외주의와 지정학적 전략을 통합한 형태였다. 이는 Realpolitik이 시대와 맥락에 따라 변화하는 유연한 개념임을 보여준다.
Bew의 연구는 Realpolitik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동시에 Realism의 한계를 드러낸다. Realism이 주장하는 '현실'이 얼마나 현실적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Realism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역사적 맥락의 간과: Realism은 종종 역사적 맥락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Realpolitik의 변천사는 정치적 현실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크게 변화함을 보여주지만, Realism은 이러한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Realism이 그리는 '현실'은 오히려 특정 시기, 특정 상황에 국한된 제한적인 현실일 수 있다.
- 국가의 단일성 가정: Realism은 국가를 단일하고 합리적인 행위자로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Realpolitik의 실제 적용 사례들을 보면, 국가 내부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비합리적 요소들이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Realism이 그리는 '현실'이 실제 정치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권력 개념의 협소성: Realism은 종종 권력을 물질적, 군사적 능력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Realpolitik의 역사는 이데올로기, 문화, 외교 등 '연성 권력'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Realism의 '현실'은 권력의 다양한 형태와 작용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
- 변화에 대한 설명력 부족: Realism은 국제 체제의 구조적 변화를 설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냉전의 종식이나 글로벌화와 같은 큰 변화를 예측하거나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Realism이 그리는 '현실'이 실제로는 정태적이고 고정된 세계관에 기반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Realism과 Realpolitik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개념적 구분을 넘어, 우리가 국제정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Bew의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할 수 있다:
- 이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Realism이 제공하는 이론적 틀과 Realpolitik이 보여주는 복잡한 현실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 국내 정치와 국제 정치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Realism의 국가 중심적 시각을 넘어, 국가 내부의 동학을 어떻게 국제정치 분석에 포함시킬 수 있을까?
- 권력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확장할 수 있을까? '경성 권력'뿐만 아니라 '연성 권력'의 중요성을 어떻게 더 잘 반영할 수 있을까?
- 국제 체제의 변화를 어떻게 더 잘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을까? Realism의 정태적 세계관을 넘어, 변화의 동력과 과정을 어떻게 더 잘 포착할 수 있을까?
Bew의 책은 Realpolitik을 단순한 권력 정치가 아니라, 복잡한 정치적 현실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방법론으로 재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Realism의 이론적 한계를 보완하고, 더욱 현실에 근거한 국제정치 이해를 가능케 한다.
결론적으로, "Realpolitik: A History"는 우리에게 Realism과 Realpolitik의 관계를 재고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국제정치 접근 방식을 모색할 기회를 제공한다. 특히, Realism이 과연 얼마나 'real'한지, 그리고 그것이 그리는 세계가 실제 국제정치의 복잡성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가능하게 한다.
21세기의 복잡한 국제 정세를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Realism의 이론적 통찰과 Realpolitik의 실천적 지혜를 균형 있게 활용하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단순히 'ceteris paribus'의 세계를 넘어, 변화하는 조건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고려하는 보다 현실적인 국제정치 이해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이론의 단순성과 현실의 복잡성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진정으로 '현실의' 국제정치 분석과 실천을 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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